[기자의 눈]김두영/제일은행의 책임경영

  • 입력 2001년 10월 24일 18시 39분


국내 처음으로 외국인 행장을 맡아 주목을 받았던 윌프레드 호리에 제일은행장이 1년9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그는 떠나는 자리에서 “행장 사임은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며 대주주인 뉴브리지캐피털과의 불화설을 부인했다. 하지만 이번 사퇴는 문책성이라는 것이 주변의 관측이다.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신규대출과 해외주식예탁증서(GDR) 투자로 2000억원을 물린 것이 결정적인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호리에 행장 스스로는 하이닉스가 경쟁력이 있고 돈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봤지만 결과는 달랐다. 하이닉스는 지금 8조원이 넘는 금융기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다.

제일은행은 작년에는 3500억원, 올 상반기에는 2000억원이나 벌었다.

그러나 대주주인 뉴브리지는 은행이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는데 잘못된 기업대출 때문에 수익이 줄어들었다며 최고경영자(CEO)를 갈아치웠다.

외국에서는 CEO의 경영성과를 측정해 성적이 좋으면 보너스를 주고, 나쁘면 책임을 물어 해임하는 것이 오래 전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눈을 국내 토종 은행으로 돌려 보자. 하이닉스에 많이 대출한 은행은 모두 수조원의 국민세금이 들어간 한빛 조흥 외환 산업은행 등이다. 은행당 적게는 7000억원에서 많게는 1조원이 넘게 물려 제일은행과는 비교도 안되게 규모가 크다.

그러나 책임을 물을 곳은 한 곳도 없다. “특정인에게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는 변명이 고작이다.

누구도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다 보니 하이닉스 해법은 뻔한데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이닉스는 물론이고 관련 은행들도 날이 갈수록 내상(內傷)이 깊어지고 있다.

한 구조조정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국내 은행은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직원 수를 줄였다는 점을 내세워 구조조정을 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책임경영이 정착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된 일이 없다고 봐야 한다.”

김두영<금융부>nirvana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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