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뉴스]'마운드의 천사' 실링 스토리

  • 입력 2001년 10월 18일 19시 19분


'마운드의 천사' 컷 쉴링

미국의 50번째 주(州)인 알래스카주의 앵커리지에서 태어난 컷 쉴링은 1985년 애리조나주 피닉스시 소재 셰도우 마운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쉴링은 이미 고교시절부터 주목받는 투수 유망주였다.

이후 2년제 대학인 주니어 칼리지를 거친 쉴링에게 대학 무대는 너무도 좁았다. 86년 팀을 소속 디비전 대학 월드시리즈로 이끌었으며 곧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2라운드로 보스튼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착실히 마이너리그에서 수업을 쌓던 그에게 일어난 첫 번째 변화는 88년 볼티모어 오리올스로의 트레이드였다. 이 트레이드로 인해 그는 불과 1년여만에 마이너리그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고, 그해 9월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행운까지 잡게 됐다.

하지만 너무 이르게 찾아온 성공의 길은 그에게 메이저리그의 높디 높은 벽만을 실감케 했다. 88년 4번의 선발등판 경기에서 3패, 방어율 9.82라는 성적표가 그에게 남은 모든 것.

22살의 어린 쉴링에게 시련은 이것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89-91년까지 오리올스와 휴스튼 애스트로스를 거치며 빅리그의 쓴 맛을 보았고 결국 다시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 됐다.

▽필라델피아에서 제2의 인생

두 번째 변화는 필리스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26살이 되어버린 '미완의 대기' 쉴링은 조금씩 피칭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저 공만 빠르던 투수에서 다양한 변화구종을 연마한 투수로 변모해 갔고 무엇보다 볼 커맨드에 큰 성장을 보였던 것이다.

94년과 99년은 부상으로 고전했지만 나머지 6년 필리스에서의 쉴링은 에이스 그 자체였다. 92년 14승11패, 방어율 2.35, 10번의 완투경기, 4번의 완봉승을 시작으로 97, 98년 2년 연속 300탈삼진 고지를 점령하며 '닥터 K'로서의 명성도 쌓아나갔다.

이 기간동안 꾸준히 2점대 후반 및 3점대 초반의 방어율, 평균 15승 이상을 기록해 나가면서 기복 없는 파워피쳐로서의 이미지를 굳건히 다지게 됐다.

쉴링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98마일의 묵직한 패스트 볼. 거기에 동반되는 결정구인 '지저분한(nasty)' 스플리터, 커브, 슬라이더 등은 그를 더욱 '언히터블'의 투수로 변모시키며, 그의 넓은 홈플레이드 활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된다.

▽쉴링이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된 이유

현 콜로라도 라키스의 타격 코치 클린트 허들씨는 스포팅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쉴링의 구질에 대해 "쉴링은 높은 스트라익 존을 이용할 줄 아는 몇 안되는 투수 중 하나이다. 물론 대부분의 볼은 로케이션이 잘 갖춰져 '지저분(nasty)'하고 낮게 형성된다. 그는 또한 플레이트 양쪽 구석구석을 찌르는 98마일의 패스트 볼을 구사하고 결정구론 크게 꺾이는 스플리터를 사용한다. 빠른 카운트에서는 커브 볼을,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있을 때는 우타자를 상대로 슬라이더를 던진다. 타자들은 알면서도 그의 볼을 칠 수가 없다."라며 쉴링의 위대함을 설명했다.

즉, 이러한 노력의 산물들을 무기로 그는 당대 최고의 투수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그리고 '00시즌 그에게 세 번째 변화의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99시즌 후 오른쪽 어깨 관절염 수술을 받은 쉴링에게 2000시즌은 대변화의 한해였다. '00시즌 소속팀 필리스는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고, 쉴링은 부상과 어느새 많아진 34살의 나이로 인해 미래의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필리스는 쉴링을 팔아 젊고 전도유망한 선수(트레비스 리, 오마 달, 넬슨 피겨로아, 비센테 퍼디야: 실제로 이 트레이드는 양 팀간 윈-윈 트레이드의 전형으로 손꼽힌다)들을 사와야 했으며 결국 그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넘기게 된다.

▽애리조나에서 제3의 인생

8년여를 머물며 숱한 선행을 행해온 '마음의 고향' 정든 필라델피아를 떠난다는 소식이 쉴링과 그의 가족들에게 반갑지만은 않았지만, 그를 고향타운으로 돌아오게 만든 이 트레이드는 그에게 커다란 전환점이 되고야 말았다.

트레이드로 쉴링을 얻은 애리조나는 과거 60년대 LA다저스 소속으로 시대를 주름잡던 샌디 코우팩스-단 드라이스데일 이후 최고의 원-투 펀치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찬사를 듣게 되었고 실제 그것은 곧 현실이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주위의 기대와 부상 재기 여부가 너무 부담스러웠던 탓인지 후반기 애리조나에서 쉴링의 성적은 5승6패, 방어율 3.69로 영 신통치 않았고, 그의 구위는 예전 쉴링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쉴링의 가세에도 불구하고 팀은 오히려 급추락,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절치부심, 찾아온 '01시즌 스프링캠프 기간은 쉴링에게 또 하나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다 준다.

▽아내의 피부암 선고

99년 수술과 '00시즌 부진 이후 재기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땀을 흘리던 그에게 아내 숀다 쉴링의 피부암 선고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았다.

메이저리그 그 어느 선수보다 사회적 선행과 가정에 충실하기로 소문난 쉴링이었기에 당시 아내의 피부암 선고가 그에게 가져다 줄 정신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숀다는 4번이나 피부암 수술을 받아아만 했고 쉴링은 그런 아내를 두고 마운드에 서야만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쉴링의 재기 의욕을 막지는 못했다. 쉴링은 USA투데이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처한 상황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며 오히려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성적으로도 나타났다. 전반기 아내의 투병생활이라는 악몽 같은 시간을 등에 엎고 114와 3분의 1이닝동안 11승2패, 127탈삼진이라는 기록으로 팀을 지구 수위에 등극시키는 일등공신이 되는 등 모든 의혹을 불식시키고야 말았다. 그리고 잔슨-쉴링으로 이어지는 사상 최강의 원-투 펀치는 드디어 본궤도 올라서게 됐다. 역사상 가장 압도적이고 화려한 원-투 펀치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리게 된 것이다.

그들이 기록한 성적(잔슨-21승6패, 방어율 2.49, 372탈삼진. 쉴링-22승6패, 방어율 2.98, 293탈삼진)은 분명 1965년 월드시리즈 챔피언 듀오 코우팩스(26승8패, 방어율 2.04, 382탈삼진), 드라이스데일(23승12패, 방어율 2.77, 210탈삼진)의 기록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바로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현대 야구의 특성상 당시 42번의 선발 등판에 330여이닝을 소화한 그들보다 훨씬 적은 이닝(260이닝 내외)과 적은 선발 등판 기회(35번 내외)내에서 이룩해낸 업적이기 때문이다.

▽공부 하지 않으면 쉴링처럼 될 수 없다.

쉴링은 공부 벌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타자 상대 분석 요령 데이터만해도 95년까지 CD로 90장이 넘고 무려 2만여가지의 피칭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세부적인 요소들을 연구하며, 등판하지 않는 날이면 항상 덕아웃에서 상대 타자들을 분석하고 대처하는 요령 등을 기록해 놓는다.

게다가 빅리그 심판 한명한명의 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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