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정은/판결과 진실의 사이

  • 입력 2001년 9월 11일 18시 39분


김모씨(46)는 최근 서울지법 모 판사실에 들어가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자살소동을 벌였다. 판사들이 법정에 들어간 뒤여서 판사실은 텅빈 상태였지만 라이터를 움켜쥔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표정은 결연했다.

자신이 고소한 상대방이 지난해 3월 ‘부당하게’ 무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에 “죽음으로 억울함을 알리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김씨는 “상대방이 유가증권을 위조했는데도 재판부가 특별한 이유 없이 증인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결과적으로 어음금 청구소송에서도 패소해 2억여원의 빚을 지게 됐고 아버지마저 앓아누웠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10여분간 경찰과 대치하다 결국 끌려나가 주거침입 및 퇴거불응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몇 달 전에도 판사들 앞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

담당판사는 “기록상으로 사실관계가 명백해 따로 증인을 불러 신문할 필요가 없는 데다 김씨가 낸 관련 민사소송도 이미 패소판결이 확정된 사건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사건마다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지만 기록에 나타난 사실만을 토대로 판단을 내리게 되는 만큼 모든 판결이 100%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며 법관으로서의 고뇌를 토로했다.

검찰청과 법원이 모여 있는 서울 서초동 부근에는 이처럼 ‘사법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법원 기자실로 찾아오거나 법정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드러누워 버리는 사람도 있다. 150여일 동안 대검찰청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부부도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정당한 법 집행인데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근거 있는 ‘억울한 사법 피해자’는 정말 한 사람도 없을까. 판결 자체가 옳았다고 해도 이를 반박하며 잇따라 자살까지 시도한 한 시민의 사법부 불신이 어디서 왔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정은<사회부>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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