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시간이 별로 없다

  • 입력 2001년 6월 4일 18시 30분


96년 이맘때쯤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장소는 서울 서교동의 어느 중식당. 92년 대선에서 실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DJ가 정계에 복귀해 국민회의를 창당한 때가 95년 9월. 그러니까 국민회의 총재인 DJ가 모처럼 몇몇 기자들과 점심을 함께 하던 자리였다. 우연히 DJ 옆자리에 앉게 된 필자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총재님께서 주로 말씀하시고 아랫사람들은 듣기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야 하의상달(下意上達)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하는 얘기를 둘러서 한 것이었는데 DJ는 뜻밖에도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그게 이래요. 나는 내일 아침에 무슨 회의가 있다고 하면 그 회의에서 논의할 의제나 문제점, 대안 같은 것을 밤늦게까지 검토하고 연구하지요. 그렇게 해서 회의에 나가 얘기들을 하라고 하면 대부분 말들이 없어요. 미리 준비하고 연구하지 않고 그냥 회의에 참석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어떡합니까. 내가 설명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할 수밖에요. 아랫사람들 말을 안 듣는다는 건 맞지 않아요.”

▼'군신 구조'의 언로▼

그랬을 거였다. 야당 시절 DJ 캠프에 몸담은 어느 인사치고 DJ의 풍부한 지식과 논리적 사고력, 능숙한 언변에 맞설 수 있었겠는가. 거기에 민주화 투쟁에 따른 권위가 더해지니 그들에게 DJ는 말 그대로 ‘선생님’이었을 거다. 더구나 오랜 군사정권하에서 보안에 신경을 쓰다 보니 횡적(橫的)인 커뮤니케이션보다는 종적(縱的)인 지시체제에 익숙하고, 그러다 보면 시스템으로 움직이기란 구조적으로 어려울 것이 당연했다.

종적인 의사결정 구조에서 손발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 이른바 DJ 가신그룹인 동교동계. 동교동계는 DJ 비서 출신의 인맥군이다. 따라서 DJ와 동교동계는 본질적으로 ‘군신(君臣)관계’의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가신(家臣)의 첫째 덕목은 주군(主君)을 모시는 충성심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언로(言路)가 좁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체제는 야당 시절, 특히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상황에서는 상당부분 불가피하고 효율적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적(私的) 체제’가 정권을 잡은 뒤에도 작동해왔다는 데 있다. 최근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의 ‘반란’은 이 뿌리깊은 비공식라인, 즉 비선(秘線)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비공식라인 몇몇 인물에 국정이 좌지우지되고 명색이 집권여당은 바지저고리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민주당(이전의 국민회의를 포함해서)은 정권을 잡은 후에도 무력했다. 총재권한대행에서 관리형 대표를 거쳐 지금의 ‘실세 대표’체제로 바뀌어왔다고는 하나 청와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8월 경선으로 최고위원을 뽑았다고 하지만 그들 역시 ‘무늬만 최고위원’일 뿐이었다. DJ는 비서실장 출신의 김중권(金重權)씨를 당으로 내려보냈고 청와대에는 동교동계가 포진했다. 국정운영의 틀은 여전히 ‘종적 관계’에 머물렀다.

▼당이 힘쓸 수 있을까▼

민주당의 ‘정풍(整風)’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대단한 게 아니다. 이제는 당도 청와대와 대등하게 목소리를 좀 내보자는 것이고 그러려면 비공식라인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해법 또한 간단해 보인다. 그러나 간단치 않다. 무엇보다 DJ로서는 30년 이상 몸에 배어온 ‘종적 통치’ 스타일을 단번에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DJ가 멍석을 깔아준다고 한들 ‘DJ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당이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김중권 대표가 유임된 데서 볼 수 있듯이 인적 쇄신도 쉽지 않다. 청와대를 물갈이하려고 해도 당장 뾰족한 대안이 없어 보인다. 사람만 바꾼다고 될 일도 아니다. 갑갑한 노릇이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언제까지 ‘시간을 갖고 검토’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DJ가 ‘선생님’에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과감하게 생각을 바꿔야 한다. 어제 정국운영 권한을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대폭 넘겨주겠다고 한 것이 실질적인 권력 분산이 될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그러면 모든 것을 쇄신할 수 있다. 이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전진우 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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