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배종대/대법원도 정치권 눈치보나

  • 입력 2001년 4월 8일 18시 47분


우리는 정치인이 하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그들의 잦은 말 바꾸기에 대해서는 이제 체념상태가 돼서 오히려 약속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이다. 그야말로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할 것이 그들의 말이다.

물론 이 같은 정치불신은 한 나라의 정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정직하지 못한 정치인이 오래 버틸 수 있는 나라, 그런 정치인에게 국민적 심판을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나라가 정치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국민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삼권분립의 기본정신인 견제와 균형은 정치불신이 정치 허무주의가 되지 않도록 고쳐야 할 책임을 사법부에 일임하고 있다. 병이 깊을수록 의사의 손길이 절실하듯이 다른 권력의 부패 정도가 심할수록 사법부의 역할은 더욱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그래서 법은 쉽게 말을 바꿔서는 안되는 것의 대명사처럼 돼 있고, 그 법을 집행하는 판사에게도 ‘판결은 영원히 남는다’는 말로 신중한 언행을 당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이처럼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사법부가 1년 전에 국민 앞에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 사법부도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4·13 총선이 실시되기 전에 선거사범은 신속한 재판을 통해 원칙적으로 1년 이내에 당선무효를 가리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선거법 위반 사건의 재판이 정치인들의 시간 끌기 농간에 휘말려서 국회의원 임기가 만료될 때가 돼서야 확정판결을 내림으로써 사실상 선거사범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했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1년이 지난 현재 70건의 선거법 위반 사건 중에서 33건은 아직 1심도 끝나지 않은 상태이고, 1심 판결이 내려진 37건 가운데서도 의원직 상실에 해당되는 판결을 받은 사람은 8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들 모두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내려지려면 앞으로도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한마디로 대법원이 국민 앞에 한 약속은 공염불이 되고 만 것이다.

기소를 담당하고 있는 검찰이나 이를 심판하는 법원은 의원들이 재판 출석을 기피함으로써 재판을 고의적으로 지연시킬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두 기관은 의원들의 이런 지연전술에 맞서서 선거사범의 신속한 처리를 규정하고 있는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의 내용을 관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둬야 했다. 검찰의 늑장기소는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검찰의 현주소를 반영하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원은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 후속조치를 취하지 못한 책임을 지금 와서 어떻게 변명할지 모르겠다.

이 세상의 크고 작은 어떤 권력치고 통제를 기꺼워하는 권력은 없다. 사법권의 독립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포함된 정치권에 대한 적극적 견제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즉 그들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친구가 돼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사법부는 자신의 판결이 미칠 정치적 파장을 우려해서 몸을 움츠리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풍기고 있다. 변죽을 치지도 않았는데 복판이 울리는 형국이다.

구조조정에 실패한 기업이 망하듯이 이제 민주국가로 분류되는 우리나라에서 법원이 선거부정을 뿌리뽑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외면하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고 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것이 정치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법원은 알아야 한다.

어느 선한 민주적 대통령이 사법권 독립의 시혜를 베풀어 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된다. 독립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다. 법원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가 되지 말고 그것을 쟁취하는 자가 돼야 한다. 우리는 언제쯤 대법원장이 자신의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물론 판결로써 말이다.

배종대(고려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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