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사면해야 의문사 진상규명 제대로 할 수 있다"

  • 입력 2001년 3월 28일 18시 11분


'아파르트헤이트'로 악명이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및 인권침해사례를 낱낱이 파헤친 '진실과 화해위원회(TRC)' 파즐 란데라(52)위원은 28일 "한국의 의문사 진상규명 작업이 성공하려면 가해자에 대한 사면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란데라 위원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수송동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규명위) 사무실에서 열린 '세계로부터 배우는 진상규명과 화해, 그리고 인권'이라는 주제의 워크숍에서 이같이 말했다.

의문사규명위 소속 조사관을 비롯해 제주 4·3위원회 등 30여명이 참석한 워크숍에서 란데라 위원은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화해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과거청산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면서 "정치·사회적 화해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화해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란데라 위원은 "조사대상 사건들이 너무 오래 전의 일이며 특히 자료 대부분이 폐기된 상황에서 가해자의 자발적인 폭로를 유도하려면 사면제도가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진실이라는 것은 잘못을 찾아내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피해자의 진술을 모두 진실이라고 믿었고 가해자에 대한 수사보다는 피해상황의 확인에 주력했다"며 남아공의 인권침해 조사가 성공한 나름대로의 이유를 설명했다.

란데라 위원은 "한국의 의문사 사건도 발생한지 꽤 시일이 흘렀고 관련 자료가 폐기될 가능성이 많다"면서 "더욱이 한국은 가해자에 대한 사면이 국민적으로 합의돼 있지 않기 때문에 진상규명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란데라 위원은 "TRC 활동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의 하나는 지난 83년 흑인 어린이 17명과 부녀자 7명을 학살했던 보안군의 미첼 대위가 진실을 공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온 청중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영했던 장면이었다"면서 "가해자였던 그는 지금 학살 현장에 나가 흑인들을 돕고 있다"며 사면제도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TRC는 남아공 의회가 95년 11월 공개모집을 통해 지원한 인권운동가 등을 상대로 수차례 심사를 벌인 끝에 엄선한 17명으로 구성돼 인종차별시대(1960년~1994년)의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조사활동과 청문회 등을 열어 2만2500여명의 피해자를 밝혀내는데 성공했다.

TRC는 지난 98년 7월 진상조사활동을 끝내면서 7112명의 사면 신청자 가운데 12%인 849명에 대해 사면을 허용했다.

남아공 내 NGO들이 "화해보다는 정의가 우선"이라며 사면반대 캠페인과 함께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대법원은 "사면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며 TRC 쪽의 손을 들어 주었다.

란데라 위원은 "당초 18개월이던 조사기간을 3년으로 연장하면서까지 활발한 활동으로 많은 성과를 거뒀지만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을 솔직히 고백한다"고 아쉬워했다.

산부인과 의사로서 인권운동에 뛰어든 배경에 대해 란데라 위원은 "그 상황 속에서 인권이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고 그렇게 행동 했을 것"이라며 "당시 운영하던 병원에서 경찰의 총에 맞거나 구타당한 사람을 자주 치료하게 됐던 것이 직접적인 계기"라고 설명했다.

최건일/동아닷컴 기자 gaego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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