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정치 수치 염치

  • 입력 2001년 2월 23일 18시 21분


그렇게 비루하고 초라할 수 있을까. 망하는 길만 그리도 용케 잘 밟을 수 있을까. 우리 끼리 죽기 살기로 처절하게 싸우고, 다른 나라로부터는 한없이 조롱당하고 옥죄이는 역사에 통탄하게 된다. 책을 던져 버리고 싶은 한말(韓末)의 서글픈 역사에는 수치도 염치도 모르는 이 땅 위정자들의 추한 행적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아침 신문을 던져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정치 기사를 들여다보다 역겨움에 떠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어떤 나라로부터의 망언, 가미카제 특공대의 최후 같은 외마디가 끊이지 않는다. ‘황국만세’ ‘그리운 제국시대여’를 외치듯 하는 절규다. 태평양 건너 어떤 나라의 전투기 장사꾼은 3군 참모총장을 차례로 만나고 다녔다. 4조원어치 전투기 시장을 놓고 침을 흘리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대권에 눈멀어 경제는 뒷전▼

우리 정치 리더와 추종자들은 대권(大權)에 취해 있다. 날마다 권력 장악을 위한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남의 그림을 훔쳐보며 헐뜯기로 소일한다. 해외에 물건을 파는 기업인들은 ‘정말 한국 경제에 올해 내년이 중요하다’고 목메어 외친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귀에는 ‘내년’하면 대선이나 자치선거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와중에 어떤 전직 대통령의 실언은 예기치 못한 정쟁까지 유발한다.

백십수년 전의 정쟁도 낱낱의 정파 입장에서 보면 ‘국가와 민족’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개화파 김옥균이나 박영효도, 이들과 원수가 되어 싸운 민씨 정권도 각기 제 처방만이 구국의 길이라고 했다. 낡고 병든 나라를 구하는 방법과 철학의 차이였을 뿐이다. 그러나 방법과 가치관의 차이 정도에도 불구하고 그 지독한 대립은 분열과 패망을 재촉했다.

콩가루처럼 나뉘어 싸우고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예를 들면 같은 친일 개화파인 김옥균과 박영효는 함께 일본에 도망해 있어도 따로 놀았다. 민씨 정권은 죽이도록 미운 김옥균을 암살해 시체가 도착한 이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참혹하게 훼손하고 망가뜨려 수일 동안 길가에 효수했다. ‘야만적’이라는 외국의 평판에 부끄러워해야 했다.

김옥균은 43세 나이로 암살당할 때까지 9년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재기를 별렀다. 일본의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나고자, 청나라 실세 리훙장(李鴻章)을 접촉하고자 몸이 달았다. 그들을 만나면 세 치 혀로 설득해 김옥균의 손으로 나라를 도탄에서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토도 리훙장도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러다 리훙장 면담을 꿈꾸고 중국에 가서 동족 홍종우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맞는다.

‘김옥균이 차라리 동학과 전봉준에 눈을 돌렸더라면 어땠을까.’ 이토나 리훙장을 만나려던 정열과 노력 대신 조선의 ‘위로부터의 혁명’(개화당)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만났더라면 이 땅의 역사는 어떻게 흘렀을까. ‘청일전쟁’이라는 소설에서 중국인 작가 천순천(陳舜臣·일본 거주)은 가정해 본다. 소설의 여러 군데에서 그런 김옥균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토로하고 있다. ‘처방을 안에서 조선 핏줄끼리 구해 보았더라면….’

한국 정치는 오늘도 뜨겁게 치받는 싸움판이다. 여느 때처럼 내 탓은 전혀 없는 ‘남의 탓’ ‘네 탓’전쟁이다. 정권을 쥔 여당은 안기부 선거자금, 그것이 국고수표에서 나간 것이라는 증빙을 잡아 이전 정권의 부도덕성을 외친다. 지난 2년여 야당의 ‘여당죽이기’ 비협조 같은 거대 야당의 횡포를 응징하겠다는 태세다. 야당은 ‘이판 사판’의 저항이다. 그 국고수표라는 증거가 맞건 틀리건 야당죽이기요, ‘정치사건’이라고 대든다. 총재는 ‘악법은 법이 아니다’고 항변하고, DJ비자금은 파묻고 야당만 뒤지는 공권력에는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고 벼른다.

▼정치놀음 얼마나 더 봐야하나▼

한 전직 대통령은 도쿄에 가서도 국내 정쟁의 도화선에 불이나 지른다. 94년 언론 세무조사 결과에 자기가 놀랐다느니, 깎아 주었다느니 해서 국정조사 논란의 빌미를 주었다. 회고록이라는 것에는 검증 불능의 기억과 감정적인 주장을 써넣어 온 세상이 시끄럽다. 오직 ‘명예회복’이라는, ‘IMF망국’을 부른 대통령이 아니었다고 말해 달라는 그의 몸부림에 여야가 치를 떤다. 수치와 염치를 생각하게 하는 이 비루하고 초라한 정치 놀음을 얼마나 더 견뎌야 할 것인가.

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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