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DNA가 바뀌고 있다/中]온정주의 옛말

  • 입력 2001년 1월 15일 18시 50분


신(新)평가제도의 핵심은 각자의 실적과 능력에 따라 연봉을 받는다는 점이다. 여기엔 영업직뿐만 아니라 지원 부서 직원도 포함된다. 새 제도는 우리 문화와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박준성 성신여대 교수는 “연(緣)의 문화로 상징되는 지연 학연 혈연의 부정적인 고리가 깨지는 장점이 있지만 조직내 개인주의가 팽배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 중심 사고의 확산〓새 제도의 가장 큰 미덕은 평가 항목이 명확히 공개되고 업적 부분이 평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조직원들이 자신의 일에 집중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전 직원의 업적이 성적순으로 공개된 이랜드의 한 디자이너는 “비교평가제 전에는 직장에서 상사가 지시한 일을 먼저 하거나 관행에 따라 일을 했지만 지금은 실적과 직결되는 일을 집중적으로 하는 ‘일 중심 마인드’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디자이너는 과거엔 디자인에만 신경을 썼지만 요즘은 자신이 디자인한 옷이 얼마나 잘 팔리는지 매장에 나가 체크해 보고, 판매사원과 고객들이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자주 묻는다는 것.

신평가제도는 실적이 명확한 영업부서 외 직원들에게도 평가의 잣대를 갖다 댄다. 삼성생명은 금년부터 지원부서의 직원들도 매일 평가를 한다. 직무분석을 통해 각자 해야 할 항목이 정해지며 각 항목은 업무 중요도에 따라 가중치가 부여돼 있다. 직원이 보고서를 써내면 상사는 보고서를 읽고 바로 등급을 평가, 직원에게 알려준다. 직원은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관리자는 누가 일찍 출근하든 말든, 업무중에 사우나를 가든 말든 이를 체크하며 업무를 독려할 필요가 없다.

두산 종가집김치 구매담당 전기성 과장(37)은 “상사와 연초에 합의한 목표가 ‘숫자’로 명확히 정해지니까 어떻게든 목표를 해내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생긴다”며 “과거에는 다른 부서와 대화가 별로 없었는데 각자 업무와 연결된 부서와의 협조가 결국 자기 실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협조가 잘 된다”고 말했다.

승진 연차가 찬 사람에게 고과를 ‘몰아’주는 온정주의나 상사의 지연 혈연 학연을 고과에 반영하던 관행도 급속히 사라져 가고 있다. SK㈜의 경우 통계 처리를 통해 특정 관리자가 너무 후하게 고과를 매긴 것으로 평가되면 이 관리자가 매긴 평점을 일률적으로 깎아 버린다. 한솔제지는 승진 대상자가 너무 고과를 잘 받는 경향이 나오면 고과를 매긴 관리자에게 ‘경고’가 주어진다.

▽‘정(情)’의 문화는 어디로〓98년 4월 연봉제가 도입된 R증권의 명동지점. 실적이 좋아 억대 연봉을 받는 김모대리(31)는 지점에 자기 방을 따로 갖고 있다.

실적에 따라 연봉이 정해지고 승진도 역전되다 보니 서로간에 말투도 어색해졌다. 위계 질서가 붕괴되고 개인플레이가 심해지다 보니 서로 회식을 꺼린다. 서로간의 개인사까지 훤히 알던 ‘정(情)’의 문화는 사라졌다. 호봉제를 없앤 제일제당은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직원들끼리 서로 ‘○○님’이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정했을 정도.

연봉제하에서는 자신의 고과나 연봉을 다른 사원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는 서약을 한다. ‘가족’처럼 뭐든지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문화가 연봉제에서는 유지되기 힘들다.

한국IBM의 김모씨(30)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며 입사 연수도 같은 남자 사원의 부인들끼리 최근 이야기를 하다가 남편의 봉급이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을 알고 봉급이 적은 사원 부부가 이날 부부 싸움을 했다”며 “다음날 봉급이 적은 사원이 동료에게 ‘부인 입단속 좀 시키라’고 항의한 뒤 이 부부도 이날 대판 부부싸움을 했다”고 말했다.

고과에 연결되는 일은 열심히 하지만 ‘생색이 나지 않는 일’‘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을 모두 꺼리게 된다. 동부화재 임태건씨(30)는 “연봉제 이후 처리하기 힘든 일이나 골치 아픈 문제는 서로 떠넘기려 한다”며 “괜히 잘못 나섰다가 일이 잘못되면 바로 고과가 떨어지는데 누가 힘들거나 골치 아픈 일을 맡겠느냐”고 말했다.

업무 노하우의 공유나 후배에 대한 교육도 소홀해지는 편이다. 이는 결국 기업의 장기적인 경쟁력을 갉아먹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때문에 이랜드 등 일부 기업에서는 조직내에 지식을 전파하는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고 있다.

<이병기·박중현·하임숙기자>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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