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과 서의 벽을 넘어]장회익교수 "지구도 하나의 온생명"

  • 입력 2000년 12월 10일 19시 03분


1988년 4월. 유고슬라비아의 고도(古都) 두브로니크에서 개최된 과학 철학 학술회의에서는 지구 전체를 하나의 생명 단위로 보는 ‘글로벌 라이프(global life)’라는 새로운 개념이 제기돼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주인공은 ‘생명의 단위(The Units of Life:Global and Individual)’란 논문을 발표한 서울대 물리학부 장회익 교수. 그는 1992년 이 개념을 ‘온생명’이라는 한국어로 발표했다.

◆ 동양의 틀로 서양과학 포용

두브로니크에서 장 교수의 발표를 들은 한 서양학자가 물었다. “온생명이라는 포괄적 단위로 생명을 보게 된 것은 당신이 동양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장 교수는 그 자리에선 부정했지만, 나중에 되새겨 보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서양학문을 공부해 왔지만 무의식적으로 동양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정반대의 힌트를 얻어 서양과는 다른 문화권 안에 있기 때문에 서양인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동양인으로서 서구과학을 배워야 한다는 약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지요.”

◆ 물리학 연구하며 한학 독학

서양식 교육을 받으며 자연과학을 공부한 장 교수가 동양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집안 내력과도 관련이 있다. 혼자서 틈틈이 한문공부를 해 온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직계 후손이다.

장 교수가 동양의 자연관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1980년대 들어 장현광의 저술인 ‘우주설(宇宙說)’을 보면서 동양인들이 서구적 기준과 전혀 다른 시각에서 우주를 보아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서양의 지식은 다른 사람들을 접하는 대인(對人) 경험이나 물체를 접하는 대물(對物) 경험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지만, 동양의 지식과 문화 전통은 ‘나의 문제’ 해결에 초점이 놓이는 대생(對生) 경험이 중심이 돼 왔습니다. 대생 경험이란 ‘우리가 어떤 삶의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 안에서 성공적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삶의 원초적 관심을 충족시키는 경험입니다.”

◆ 자연과 인간 구분하지 않아

구체적인 인생의 문제를 중심으로 우주를 바라봤기 때문에 자연을 몰가치적 대상으로 보지 않았고, 따라서 서양과 달리 자연과 인간 또는 사실과 당위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사한 지구유기체설을 주장하면서도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가 지구의 물리적 측면만 강조하는 데 반해 장 교수의 ‘온생명’은 생명과 정신을 동시에 지니고 성장해가는 의미를 지니는 것도 이들이 서로 다른 전통 아래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생명-정신 포괄하는 프레임 제시

장 교수는 세포나 DNA 등 점점 더 세분화된 영역으로 들어가면서 생명현상을 밝히는 대신 오히려 하나의 개체가 자족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범위에서 생명의 단위를 찾았고, 그것은 태양계 안에서 지구 정도의 생존환경을 갖춘 ‘온생명’이었다.

“온생명은 생명과 정신, 사회와 문화 등을 모두 포괄하는 프레임입니다.”

그는 ‘온생명’을 통해 인간 문명이 온전한 길을 가고 있는지를 반성한다. 온생명의 생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서 그에 맞도록 삶의 방식을 바꿔나가며 인류의 당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그의 과제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khc@donga.com

◆ 서울대 장회익교수 약력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1961)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 물리학 박사(1969)

△현재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 겸

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 겸임교수

△저서로 ‘과학과 메타과학’ (1990) ‘삶과 온생명’(1998)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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