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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1월 17일 16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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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작은 거인입니다. 융프라우가 관광객들 사이에서 유럽 최고봉의 명성을 즐기는 동안, 쉴트호른은 산악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우아한 전망대 하나를 세우는 것으로 단신 콤플렉스를 거뜬히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죠.
태양열의 힘으로 360도 회전하는 전망대 피츠글로리아. 융프라우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짜릿함이 있다면, 쉴트호른에서는 봉우리 모습 하나 하나를 아우르는 푸근함이 있지요. 그래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고봉들은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어린 동생을 호위하는 늠름한 형처럼 선량해 보입니다.
산을 좋아해서, 자고 있는 나우를 들쳐 안고 새벽 5시 기차로 서둘렀건만, 가는 방법이 어찌나 복잡하던지요. 인터라켄까지 기차 타고 가서, 케이블카, 버스, 다시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쉴트호른에 오른 시각이 오전 9시. 그나마 시간이 일러서인지, 운 좋게 창가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와! 눈 덮인 알프스가 눈 앞에 병풍처럼 펼쳐지는 절경. 저것이 해발 4158m 유럽의 최고봉인 융프라우군요. 처녀라는 이름이 붙은 걸 보면, 처녀의 콧대가 높긴 높은 모양이죠? 그 곁에 늘어선 4099m의 묀히, 3983m의 글래처호른, 3970m의 아이거 등 200여 개 봉우리들이 우리를 반기며 나란히 사열합니다.
360도 서라운드 알프스의 절경을 즐기고 있을 때, 나우가 배고프다고 칭얼대기 시작하는군요. 웨이터 아저씨는 쉴트호른의 명물, 007 제임스 본드 메뉴를 추천하면서, 쉴트호른이 영화 '007 여왕폐하'의 통쾌한 액션 촬영지였다는 설명도 잊지 않습니다. 푸짐한 식사에 아찔하도록 차가운 샴페인 한잔이 곁들여진 007 아침식사를 나누며, 제임스 본드의 쾌적한 낭만에 잠겨봅니다. 이제 진한 커피 한잔으로 이른 아침의 알딸딸한 샴페인도 녹이고, 쉴트호른 스탬프가 찍힌 엽서에 몇 자 적어 볼까요. 어느새 피츠 글로리아도 관광객으로 떠들썩해지기 시작하는군요. 조금 전 식사를 하고 카메라를 두고 간 미국인 부부가 무사히 카메라를 찾아 돌아가는 광경도 미소짓게 합니다. 창가에 두었다던 카메라가 360도 회전에서 제자리로 돌아 왔다나요.
두시간 남짓 알프스 정기를 받고 다시 길 떠나려던 나우네 가족. 앗, 저기 007 영화속 쉴트호른 명장면을 감상할 수 있는 영화관이 있군요. 덤으로 알프스의 자연을 주제로 한 슬라이드 쇼까지. 비발디의 사계를 배경으로, 3개 입체화면에 펼쳐지는 절경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결국 한번 더 보자며 여유를 부리다가 케이블카를 놓치고 말았답니다. 결국 인터라켄에서 출발하는 브리엔즈 행 배 시간를 맞추려고 유모차 끌고 달리기까지... 아, 유모차 끌고 10분간 뛰어 보지 않으신 분은, 인생에 대해 논하지 말아주십시오.

이제 배에도 올라탔으니, 모자 아래 흐르는 땀을 닦으며 유명한 브리엔즈 호수의 절경을 만끽하기로 하죠. 인터라켄이라는 지명은 두 개 호수(Laken) 사이(Inter)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 두 개의 호수란, 튠 호수와 지금 우리가 항해하는 브리엔즈 호수지요.
브리엔즈 호는 캐나디언 로키의 호수를 연상시키는 에메랄드 빛 아름다운 호수입니다. 스위스의 호수들 가운데 가장 물이 깨끗하다는데, 아쉽게도 물이 차서 수영할 수 있는 기간이 가장 짧답니다. 일전에 제네바 호수의 수영 기회를 놓친 나우엄마. 이번에는 옹골차게 나우의 수영모자까지 챙겨 왔는데... 이번에도 불발이군요.
우리가 향하는 브리엔즈라는 마을은 일전에 기차를 타고 지나가다 너무 아름다워 방문하게 된 곳이에요. 목공예 아틀리에가 많아 나무꾼 마을이라는 별명을 가졌다지요. 인터라켄에서 브리엔즈는 기차로 10분 거리. 이 간단한 방법 대신, 한시간 남짓 걸리는 항해를 고집한 것은, 물길을 거쳐 브리엔즈로 입성하고 싶었기 때문인데요, 덕분에 아담한 어린이 증기기관차가 호반을 따라 달리는 정겨운 풍경도 즐길 수 있었지요.

우리가 하루 묵어가기로 한 민박집 '왈츠'는 입구에 들어서면서 부터 빵 냄새가 구수한 곳이죠. 150년째 5대에 걸쳐 운영하고 있는 빵집 '왈츠'에서 만드는 브뤼엔저그뤼스는 이 마을의 명물입니다. "운이 좋으시네요. 지금 전망이 제일 좋은 방 하나가 비어 있거든요" 여주인이 건넨 열쇠를 따고 들어간 순간, 호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지요.
보통 때는 숙소에 짐만 내려놓고 지도 들고 열심히 볼거리를 기웃거렸지만, 그날은 새벽 동이 틀 때까지 발코니에 앉아 호수만 바라 보았습니다. 밤새 쏟아지던 장대비, 알프스의 발 아래 길게 누운 브리엔즈 호수... 지금쯤 빵집 '왈츠'에서는 겨울 도너츠인 브리엔제크라펜을 굽고 있겠군요. 음, 배고파. 달작지근한 그 맛이 그리워, 품에 안고 있던 군고구마 하나를 꺼내 먹습니다.
나우엄마(nowya200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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