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디지털]'선비정신' 속에 한국의 힘 있다

  • 입력 2000년 11월 13일 18시 45분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은 중국과 일본의 거듭된 침공에도 불구하고 500여 년 동안 나라를 지켜오며 자랑스런 정신 문화를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이런 업적은 모든 국민의 단합된 힘의 결과라 하겠으나, 나라를 지키고 문화를 꽃피움에 있어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의 강직하고 여유로운 정신력이 아닐까 한다. 오늘의 한국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현실을 바라보며, ‘선비정신’의 쇠퇴를 아쉽게 여기는 것은 나 한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모두 유학에 통달했고, 인간에게는 지켜야 할 도리(道理)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선비다운 선비들은 그 도리를 벗어남이 없도록 바르게 살기 위해 항상 욕심을 자제했다. 도리를 벗어남이 없이도 부귀를 누릴 수 있다면 굳이 그것을 회피할 까닭은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도리를 어기지 않고 부귀를 누리기는 매우 어려웠던 까닭에, 선비들은 항상 지나친 물욕과 권세욕을 자제하고 깨끗하게 살기를 도모했다.

사사로운 이익보다도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선비다운 선비들에게 공통된 신념이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의 ‘나’ 보다 대가족을 먼저 생각했고, 가족보다 국가와 민족이 더욱 중요하다는 관념을 안고 살았다. 위대한 선비로서 존경을 받은 사람들은 ‘대아(大我)’를 위해 살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특히 ‘의(義)’를 숭상했다. 그들은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했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비록 왕이라도 옳지 않은 길을 가고자 했을 경우에는 중벌(重罰)을 무릅쓰고 충간(忠諫)했으며, 이웃나라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탁월한 선비들은 근엄(謹嚴)과 강직(剛直)만을 숭상하지는 않았다. 진정 선비다운 선비들은 자연을 벗해가며 예술을 즐기는 풍류(風流)로써 마음의 여유를 갖도록 삶을 설계했다. 대다수의 선비들은 시문(詩文)과 서화를 즐겼으며, 더러는 음악과 무예에 심취하기도 했다.

조선조 선비들의 깨끗하고 꼿꼿하며 여유롭기까지 한 정신이 조선조의 500여 년을 지탱한 정신적 버팀목 구실을 했으리라고 보는 우리의 심증에는 별로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한국을 지탱하는 정신적 버팀목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일까. 오늘은 어떤 집단이 등대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한때 정권과 그 주변 사람들이 국민을 도덕적으로 이끌어가려 시도한 적이 있다.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주도하는 윤리운동은 곧 벽에 부딪혔다. 앞으로도 정치에 대한 불신이 불식되지 않는 한 정치가들에게 등불이 돼 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향력이 강한 집단으로 다음에 생각하게 되는 것은 경제인이다. 그러나 정치가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재의 상황에서는 경제인에게 걸 수 있는기대에도 뚜렷한 한계가 있다.

세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대학인(大學人), 교육자, 종교인 그리고 언론인 등 이른바 ‘지식인’ 계층이다. 우리는 4·19 당시 대학생과 교수가 앞장서서 나라 걱정을 했던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많은 학생들이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교수들도 그들의 몸짓에 대해 보이지 않는 성원을 보냈다. 대학사회가 지성인 집단으로서의 면모를 지켰던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이 좌익의 색채를 들어내면서부터 교수들은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됐고 대학생 내부에도 분열이 생겼다. 그런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했고 군사정권의 위세도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이런 변화는 우리나라의 지성사회가 하나로 뭉쳐서 대항해야 할 대상이 없어졌다는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동구의 여러 나라가 무너지고 군서정권이 물러간 뒤에도 우리나라에는 많은 문제가 남았다. 나라의 근본을 흔들 수도 있는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뭉치는 힘이 부족하다. 조선조의 선비를 거울로 삼고 오늘의 지성인들이 힘을 모을 때가 아닐까 한다.

김태길(학술원 회원·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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