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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1월 3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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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10월 들어 서울 가까운 사찰 두 군데 불상에 이상한 물체가 피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불상 눈썹에서, 몸통에서 실낱같은 ‘꽃’ 비슷한 것이 피어오른 것이 발견된 것이다. 이게 입에서 입으로 번지면서 우담바라가 되고, 어떤 신문에 ‘발견’사실이 보도된다. 곧 TV를 타게 되고 다른 몇몇 신문들이 앞다투어 사진을 찍어내면서 극락에나 핀다는 꽃이 이 땅에 피어나고 말았다.
불교신도말고도 그저 산에 오른 사람들까지 절에 몰려들었다. 상서로운 일을 기념해 사찰주변에는 ‘관세음보살님 우담바라로 나타나셨네’ ‘여기 우담바라 피었다’는 플래카드까지 내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문가라는 분이 갔으나 부처님 존안에 대한 채취 검증을 말리는 통에, 멀찌감치서 쳐다만 보고 뭔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일이 더 ‘꼬이게’ 된 것은 그 뒤였다. 곤충학자들이 나서서 풀잠자리가 나뭇잎 창틀 빗자루 같은 아무데나 알을 낳듯이 불상에 알을 깐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애벌레가 빠져나갈 때 알껍데기가 벌어지므로 마치 꽃이 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보도가 이어지자 다시 사찰 방문객의 발걸음은 뜸해지고, 그럴 줄 알았다는 비아냥에다, 되레 불교에 실망했다고 하는 사람도 생겼다.
이제 겨우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한 사찰이 곤충학자의 불상 접근을 허용해 돋보기로 살펴보게 하고 “학자의 과학적 결론을 받아들인다”고 밝힌 것이다. 다른 사찰도 ‘설령 풀잠자리 알로 규명된다 해도 이것이 대자대비의 관세음보살상에 앉아 중생기도와 성불을 하는 데 지름길이 됨은 상서롭고 신령한 일이라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처음부터 ‘기적이나 신이(神異)에 기대는 것은 위험하다’던 한 스님의 말대로 된 것이다.
풀잠자리는 여느 해처럼 가을 하늘로 떠나갔다. 우담바라는 플래카드나 군중의 볼거리에서 헤어나 비로소 전설과 불법의 가운데로 다시 자리했다. 이 사태에 풀잠자리는 책임이 없다. 자연 속에서 그렇게 생기고 사라져 온 생태대로 알을 까고 날아갔을 뿐이다. 풀잠자리는 누구를 홀린 일도, 스스로 우담바라라고 감히(?) 우긴 적도 없다. 우담바라 전설도 탓할게 없다. 우담바라는 경전과 전설에 숨은 채로 인간에게 우매함을 깨치고 정진(精進)하라는 채찍으로, 상상의 꽃망울로 스스로를 감추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끼리의 어리석은 자작극이었다. 사람들이 곤충알을 우담바라라고 우겼고, 사람들이 처음부터 별로 믿어지지도 않는 미혹(迷惑)에 스스로 빠져들었으며, 미구에 과학의 결론이 드러나자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찬 것도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사찰을 탓할 것인가. 플래카드도, ‘108기도 정진’도 발견과 소문 보도로 인한 인파 뒷감당이었고, 그 구설의 후유증을 겪고 있으니 이래저래 사찰측도 피해만 본 셈이다.
어찌 풀잠자리 소동뿐일까.
겉보기에 그럴듯하다는 이유로 검증도 없이 퍼뜨리고 거기 휘둘리며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어떤 필요에 의해 퍼뜨려지는, 경제를 둘러싸고 이어지는 무슨 대란설, 정치무대의 의혹설 같은 것이 너무 헤프고 잦다. 그리하여 던진 돌에 맞고 제 돌에 되맞는 식의 손실과 타격을 너나없이 입는다. 증거가 없다면서도 의혹을 제기하는 의욕과 용기 대신에 치밀한 사실확인과 추적에 나선다면 또 다른 ‘풀잠자리 소동’ 같은 악순환은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기는 이의 고성과 반론의 삿대질, 정작 가려야 할 측의 눈치보기로 오늘도 세상은 아수라판이다. 공방의 당사자는 감정을 추스르고 차갑게 실체를 파헤치는 자세여야 하며, 가리는 의무를 가진 이들은 실체적 진실을 햇볕 아래 밝히는 데 양심을 걸어야 한다. 면책특권을 빌려 펼쳐지는 그 숱한 의혹과 정치 공방의 어수선함 속에서 실로 이득은 누가 보며, 피해자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다.
김충식 <논설위원> 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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