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현진/계열분리 피보다 진하다

  • 입력 2000년 11월 2일 19시 24분


한국판 압축성장의 견인차였던 현대건설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현대건설이 모진 수모를 겪는 것은 무엇보다도 현대건설 스스로 자구노력을 게을리한 탓이다.

그러나 그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계열분리의 위력’을 만나게 된다.

현대건설은 10월말 전환사채(CB)를 현대자동차 등에 팔아 약 800억원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계열관계가 없는 현대자동차가 이를 사줄 리 없었다. 이로 인해 자구계획이 차질을 빚자 은행과 제2금융권에서 자금회수에 나서 10월 한달간 1400억원을 회수해버린 것.

계열분리를 재벌개혁의 숙제처럼 떠벌리던 정부도 이번에는 뒤통수를 맞았다.

정부는 현대건설 자구대금을 ‘한때의 형제 기업’들이 도와주기를 은근히 바랐고 또 이를 언론에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형제 기업들은 등을 돌렸고 정부도 더 이상 뭐라고 할 근거가 없어졌다.

현대자동차는 현대건설이 ‘사느냐 죽느냐’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던 1일 보란 듯이 서울 양재동에 신사옥을 세우고 기념식을 가지기도 했다.

이를 두고 은행권 관계자는 “계열분리가 재벌 개혁에 얼마나 위력적인가를 보여주는 첫 사례”라고 평가했다.

계열분리가 안돼 상호출자와 지급보증으로 얽혀 있을 때는 그룹의 주력기업이 위험할 때전 계열사가 함께 도와야 계열사들도 ‘일단’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대우그룹은 이같은 방식으로 부실을 온 그룹이 함께 떠안고 가다가 결국은 공멸한 경우다.

그러나 계열분리가 되어 있으면 도마뱀처럼 꼬리를 자르고 몸통만 사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제도가 행동을 바꾸는 한 사례를 본 셈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제도를 선진화하려는 이유가 아닐까.

이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은 최소한 재벌들에게는 바뀐 것 같다.

계열분리는 피보다 진하다고.

박현진<금융부>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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