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正 祖(정 조)

  • 입력 2000년 10월 29일 19시 00분


正 祖(정조)

汚―더러울 오 寡―적을 과 諱―꺼릴 휘

¤―깊을 색 閱―읽을 열 窩―움집 와

그동안 중국의 문화를 공부하면서 은연중 양국의 帝王을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기록에 의하면 漢高祖(한고조·BC 206년)부터 淸나라가 망한 光緖(광서·1908년)까지의 2100여년간 자칭 타칭의 ‘天子’는 모두 208명이다(평균 재위기간 10년, 평균수명 42세).

그러나 그 많은 帝王들 중에 아무리 눈을 닦고 찾아 봐도 世宗大王처럼 과학적 재능을 지녔다거나 正祖처럼 효심과 학문, 그리고 통치력을 겸한 훌륭한 제왕은 없는 것 같다.

특히 正祖(1752∼1800)의 경우, 한 인간으로서 지녔던 지극한 효성이며 통치가로서의 탁월한 정치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했던 뛰어난 학문정신 등은 필자의 寡聞(과문)으로 볼 때 中國은 물론 세계 어느 帝王도 감히 따르지 못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좀 더 장수했더라면(年壽 49歲, 재위 24년)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조선 제22대 제왕으로 이름이 j(산)이며 호는 弘齋(홍재)다. 이처럼 僻字(벽자)로 이름을 취한 것은 전에도 설명한 바 있는 백성들의 ‘避諱’(피휘)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 思悼世子(사도세자·후에 莊憲世子로 추존됨)가 뒤주에 갇혀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으며 치열한 黨爭의 와중에서 일신의 목숨마저 보전하기 어려운 때를 보내야 했다. 그 역시 黨爭(당쟁)의 희생자로 소년 시절은 여타의 제왕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悲運(비운)과 위험의 연속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逆境(역경)을 특유의 好學精神으로 극복한다. 世孫(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貞t堂(정색당)이라는 書庫를 지어 도서수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과거 明나라에서 기증한 중국서적을 모았으며, 수시로 入燕使節(입연사절)을 통하여 새로운 서적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典籍이 늘어나자 다시 西庫와 閱古館(열고관)을 두어 각기 國內本과 中國本을 나누어 보관하였고 中國本의 전적이 늘어나자 이번에는 皆有窩(개유와)라는 書庫를 별도로 증축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皆有窩를 淸學 연구의 산실로 삼아 당시 절정에 달했던 중국의 乾隆(건륭)문화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학문을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이 같은 學問에 대한 熱情은 登極과 더불어 활짝 꽃을 피워 조선 未曾有의 文藝復興期를 이루게 된다.

鄭 錫 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478sw@emai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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