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이래서 명작]토머스 하디 '테스'

  • 입력 2000년 10월 25일 15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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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섹스의 꿈과 사랑

토머스 하디는 《테스》나 《귀향》으로 친숙한 영국 소설가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웨섹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고향 도체스터를 모델로 한 것이다. 하디는 건축일을 하는 아버지와 독서와 민요암송을 즐기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국 남부의 도체스터 읍으로부터 1마일 가량 떨어진 하이어 보켐턴이 그의 고향이다. 당시 도체스터는 농촌지구의 상업 중심지 역할을 하긴 했으나 다소 외진 지역으로, 그때까지 철도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린시절의 하디는 매우 내성적이고 몸이 약한 편이었다. 시골 풍경과 삶, 시골 사람들의 미신이나 풍속에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체험은 소설을 쓰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하디는 마틴 부인이 세운 학교에 입학했는데 몸이 너무 약해 학교까지 걸어다니지도 못했다. 1년 후 하디는 도체스터에 있는 학교로 옮겨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 하디가 학교에서 받은 공식 교육은 약 8년 동안의 이 기간이 전부다.

학교를 마친 하디는 16세에 도체스터의 건축가 존 힉스 밑에 견습공으로 들어가 건축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6년간 지속했던 건축일은, 소설쓰기와 더불어 그의 중요한 경력 사항이 된다. 하디는 건축을 배우면서도 독학으로 그리스 고전과 영문학 및 불문학, 철학, 신학 서적들을 두루 읽었다. 이 무렵 하디는 윌리엄 반즈와 호레이스 몰의 영향을 받아 당시의 급진적인 사상에 눈뜨게 된다. 그는 고급 수준의 건축술을 배우기 위해 런던으로 옮겼고, 건축에 관한 논문으로 상을 받는 등 건축에도 재능을 나타냈지만 문학적 야심도 함께 키워나갔다.

런던 체류 동안 하디는 몸이 많이 약해져 1867년 여름, 고향 도체스터로 돌아와 다시 힉스 밑에서 일했다. 하디는 건축을 하는 동안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을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소설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7년 후반에 첫 소설인 《가난뱅이와 귀부인》을 썼다. 이 무렵 하디는 근방에 살던 11살 연하의 사촌 여동생인 트라이피나 스팍스와 사랑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디는 그녀와 약혼했으나 곧 파혼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후 자신의 시에서 '잃어버린 보물'로 회상할 만큼 그녀에게 강하게 끌렸던 것 같다.

하디는 두 번째 소설을 집필하면서도 건축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1870년 봄, 그는 교회 건물의 복원 작업 문제로 콘월의 세인트 줄리엇으로 파견되었다. 그곳 목사관에서 하디는 첫 부인이 된 엠마 라비니아 기포드를 만난다. 활발한 성격에 문학적 열정이 대단하고, 하디의 창작에 관심을 보였던 엠마에게 그는 강하게 끌렸다. 엠마는 변호사의 딸로 하디보다 높은 사회 계층에 속한 여성이었다. 이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며 하디의 불행한 결혼 생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디는 본격적인 창작활동의 시작인《광란의 무리를 멀리 떠나》를 통해 점차 국내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디는 이 소설이 매달 잡지에 연재되던 1874년 11월, 엠마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그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고 하디 부부는 도체스터 근방에 대지를 구입, 1885년 완공된 맥스 게이트 저택에 입주하였다. 이후 하디는 계속 이 저택에서 살았고 가장 유명한 작품《테스》와 《무명의 주드》 집필을 완료했다.

1893년, 하디 부부는 더블린을 여행한다. 거기서 하디는 여러 해 동안 문우이자 단편집필을 함께 했던 여류작가 플로렌스 헤니커를 만난다. 하디의 시편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이 여류작가에게 상당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 당시 이미 하디는 결혼생활에서 상당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아내 엠마는 하디의 글쓰기를 장려하고 많은 도움도 주었지만, 자신이 하디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계급 출신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혼을 쉽게 허용하지 않던 경직된 당대의 사회현실 속에서, 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은 《숲의 사람들》과 《무명의 주드》에 깊이 있게 형상화된다.

◇명예로운 노년

하디의 말년 30년간은 영예로운 일들이 많았다. 1910년에 국왕으로부터 공로 대훈장을 수여받았고 1920년과 1925년에 각각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에버딘, 브리스톨 대학 등에서도 명예 학위를 수여받았다. 자신의 저택 맥스 게이트에서 많은 유명인사들을 접견하기도 했던 하디는 1925년에는 황태자의 방문까지 받는 영예를 누렸다. 이러한 영예로운 생활을 누리던 중 1912년에 아내 엠마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것은 하디에게 큰 충격이었다. 비록 불행한 결혼생활이었지만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다정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아내를 처음 만난 세인트 줄리엇으로 참회의 순례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914년 2월, 74세의 하디는 자신의 비서로 있던 플로렌스 에밀리 덕데일과 재혼한다. 그녀는 후에 《토머스 하디 전기》를 집필한다. 그녀는 하디의 문학적 명성을 자랑스러워했고 그를 편안하게 해주려 애썼으나 이 두 번째 결혼도 크게 행복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노년에 들어서도 하디는 시작 활동을 계속했지만, 87세 겨울에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다. 1928년 1월 11일, 하디는 플로렌스에게 〈오마르 카이암의 루바이아트〉시편을 읽어달라고 부탁해 이를 들은 후 밤 9시경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고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단 고향에 묻히고 싶어했던 유지를 받들어, 심장은 도오셋의 스틴즈포드 교회에 있는 엠마의 묘 옆에 매장되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우연히 자신이 몰락한 명문 더버빌 가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생계 수단이었던 말을 잃게 되자, 테스는 내키지 않지만 근방의 더버빌 가문에 도움을 청하려 가게 된다. 사실 테스가 찾아간 근방의 더버빌 가문은 돈을 주고 산 가문이었지만 그녀는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다. 그리고 거기서 알렉 더버빌을 만난다. 테스는 알렉의 저택에서 닭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는데, 그 사이 계속 알렉의 유혹을 받는다. 결국 장에 갔다 돌아오던 어느날, 그녀는 알렉에게 순결을 빼앗기고 아이를 임신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아이는 생후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테스는 다시 힘을 내 고향에서 떨어진 낙농장에서 일한다. 그녀는 거기서 목사의 아들인 에인절 클레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과거 때문에 망설이던 테스는 결국 에인절의 청혼을 수락한다. 그러나 결혼 첫날밤, 그간의 과거를 털어놓자 에인절은 테스를 용서하지 못하고 브라질로 떠나버린다. 혼자 남겨진 테스는 옛 동료가 일하는 농장으로 찾아가 다시 일을 시작하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테스에게 다시 알렉이 찾아와 결혼하자고 조르기 시작하는데….

The more

장정희(광운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 북코스모스 가이드북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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