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마라톤 해설자, 황영조님께

  • 입력 2000년 9월 16일 14시 07분


올림픽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세계의 눈과 귀가 모두 시드니로 향하고 있지요.

방송 3사에서는 질 높은 방송을 위해 명망 있는 스포츠 해설자들을 전진배치시켰습니다. KBS에서는 탁구의 유남규, 양궁의 이은경님과 함께 마라톤에서는 황영조님을 간판 해설자로 택하여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로만 짜여진 화려한 진용이지요. 몬주익의 영웅.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마라톤을 연이어 제패한 황영조님이니 마라톤 해설자로 나설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만감이 교차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이봉주님은 지금 시드니에 있지 않습니까? 한솥밥을 먹으며 오직 마라톤을 위해 매진했던 동갑내기. 왜 한 사람은 해설자로 남았고 다른 사람은 선수로 떠났을까요?

그렇다고 저는 이봉주님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른 황영조님의 은퇴를 비판하지는 않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길이 있지요. 인생을 걸었던 마라톤 선수로서의 삶을 접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보다 더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습니다.

또한 저는 SBS에서 마련했던 '이봉주 특집'의 전제로 깔린 비인간적인 모차르트와 인간적인 살리에르식의 대립 구도를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라이벌을 비교하는 방식은 알렉산더 대왕과 케사르를 견준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찾을 수 있을 만큼 그 뿌리가 깊지요.

그러나 이런 평가는 비교되는 부분만 확대되고 나머지 개개인의 독특한 삶 자체는 잘려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차르트처럼 재주가 승했던 황영조는 일찍 모든 것을 이루었으나 곧 그 권좌에서 내려왔고 재주는 없지만 진실되고 착한 이봉주는 비록 느리더라도 황영조를 추월하여 이제 시드니로 간다라는 설정은 영화대본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황영조님의 삶의 실체와 부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미지는 놀랍고도 끈질긴 놈이지요. 그런 시각이 어디선가 슬그머니 제기된다면, 그 근거를 자신의 그림자를 통해 살펴볼 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볼까요? KBS의 추석 특집 '슈퍼TV 일요일은 즐거워'의 '무한도전-영광의 질주 4탄'에서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의 15분 평균 기록 단축을 목표로 삼고 연예인들이 500m씩 나누어 뛰었습니다. 황영조님은 트럭을 타고 연예인들이 달리는 걸 보시더군요. 당연히 마라톤 해설자로 가셨을 터인데 마라톤에 대한 전문적인 해설은 거의 없었습니다.

얼마전 SBS에서는 조오련 선생님이 연예인들을 이끌고 현해탄을 건너셨는데, 왜 오락프로그램 하나 출연한 것 가지고 그러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조오련 선생님처럼 30년을 넘게 수영계에 헌신하시며 나이를 드신 후 한 번 쯤 세상 나들이를 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황영조님은 이제 마라톤 해설자로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 아닙니까?

길게 생각해봅니다. 10년만 지나면 황영조님도 이봉주님도 모두 은퇴를 하겠지요.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은 두 분 모두 마라톤인으로서 남은 인생을 사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수를 그만두었다고 해서 할 일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니지요. 두 분은 우리나라 마라톤을 짊어지고 나갈 두 축이니까요.

황영조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한 사람으로서 금메달감의 마라톤 해설을 황영조님의 목소리로 듣고 싶습니다. 개인적 경험과 과학적 설명, 진지한 탐구와 넓은 혜안을 지닌 명해설자로 거듭 나십시오. 그리고 동갑내기 마라톤 선수 이봉주님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힘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실체 없는 이미지란 한낱 헛것입니다. 몬주익의 가파른 언덕을 강인한 심장으로 오르신 것처럼, 이제 잠시 황영조님의 실체를 가리고 의심했던 이미지들일랑 단숨에 부숴버리세요. 다시 선수로 뛰는 것은 어렵더라도, 마라톤에 대한 황영조님의 사랑과 열정을 국민들에게 전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마라톤 명해설자, 마라톤 명지도자 황영조님을 텔레비전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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