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완배/경찰 여론 조작에 가족 동원

  • 입력 2000년 8월 24일 18시 38분


22일 한 독자가 동아일보 독자투고 담당자 앞으로 '현장 학습체험을 통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팩스로 보내왔다. 자신을 주부라고 밝힌 이 독자는 A4용지로 출력된 글을 통해 "방학을 맞은 초등학교 3학년 딸과 함께 현장 학습체험을 위해 가까운 경찰서에 찾아갔는데 경찰관들이 참 친절하게 대해줬다" 고 밝혔다.

그리고 이 주부는 "경찰관들이 겪는 고생에 비해 근무 환경이 너무 열악해 보였다. 이들을 위해 보다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그런데 가정 주부가 순수하게 경찰에 대한 생각을 적어 보냈다는 이 팩스 종이에는 전송한 곳이 '대전 서부경찰서'로 인쇄돼있었다. 자신이 직접 쓴 것인지 다른 사람이 이 주부의 이름과 주소만을 빌린 것인지 여부를 전화로 묻자 그는 "직장에서 아는 사람을 통해 팩스를 보냈다"고 발뺌하다 결국 "사실 남편이 서부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관이다"고 실토했다.

이런 경우 외에도 매일 적지 않은 경찰관들이 신문사로 독자투고를 보내온다. 읽을 만한 글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족과 친지의 이름을 빌려 "경찰의 처우를 개선해줘야 한다"거나 "어디에서 어떻게 시민을 도와줬다"는 등의 글이다. 이같은 현상은 언론에 경찰을 홍보하는 글이 채택되면 표창을 하도록 경찰청이 최근 지침을 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경찰이 국민에게 호의적인 여론을 얻고 싶어하는 그 마음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방법이다. 언론사에 "경찰이 최고야"라는 식의 글을 무더기로 보내거나 가족까지 동원해 '여론 조작'을 시도하는 방법으로 과연 국민들의 마음을 살 수가 있을까. 오히려 그 시간과 노력을 주민에게 쏟는 것이 옳지않을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조직으로서 경찰이 스스로 성실하고 주민들에게 보다 나은 치안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자세를 갖춘다면 이런 여론 조작 노력을 하지 않아도 국민들이 알아서 따뜻한 시선을 보내 줄 것이다.

이완배<사회부 기자>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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