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필라델피아'

  • 입력 2000년 8월 10일 11시 46분


<필라델피아( Philadelphia), 1992>

감독: Jonathan Demme

출연: Tom Hanks / Denzel Washington

아카데미 수상: 남우주연상, Original Song (Streets of Philadelphia) Bruce Springsteen

미국인에게 '필라델피아'는 단순히 하나의 도시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미국의 탄생지, 유럽의 구질서로부터 혁명과 독립을 쟁취한 아메리카 인들의 성지이다.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가 식민지 시절 신대륙에 정착한 영국 신민( 臣民)의 보금자리였다면 필라델피아는 유럽의 구질서로부터 혁명과 독립을 쟁취한 아메리카 인들의 정신적 뿌리가 내린 곳이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곳, 국기와 헌법이 탄생한 곳, 전세계를 향해 아메리카인과 인류의 자유의 혼을 타종한 '리버티 벨'의 산실이다. 이곳은 우리에게도 의미 깊은 곳이다.

1919년 4월 14일, 최초의 망명정부 국회가 바로 이곳에서 열렸다. 작은 한 교구의 목사와 유대인 랍비의 축원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던 그 허무하도록 순진한 절박감을 이곳 아메리카 자유의 메카에서 토해냈던 것이다. "대한독립만세!" (원성옥 역, 『First Korean Congress』 범한서적, 1986)

'형제애'(brotherhood)라는 도시명의 어원(語源)은 인종과 종교, 그리고 문화와 신조가 다른 사람들이 '형제'로서 공존과 번영을 도모한다는 미국의 이상을 대변한다. 필라델피아는 건설 초기부터 관용의 땅으로 출발했다. 필라델피아가 속하는 펜실베이니아 (Pennsylvania)주도 역사적으로 관용의 전통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이 땅은 원래 종교의 자유와 새로운 삶을 찾아 신대륙을 위해 나선 윌리엄 펜 (William Penn, 1644-1718)에게 영국의 제왕,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가 내린 선물이었다. 소수종교 퀘이커교도를 이끌고 인디언과 함께 공존의 삶을 누리면서 새로운 유형의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겠다고 공언하는 펜에게 국왕은 친구의 영웅심에 대해 조롱 섞인 경의의 뜻으로 이 원시림의 이름을 지어준다. 펜실베이니아, 라틴어로 "펜(Penn)의 숲(silva)"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는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의 전통이 깊은 곳이다. 남부 노예의 가장 큰 소망이 펜실베이니아 땅에 발을 딛고 자유와 관용의 품에 안기는 것이기도 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 (흔히 "U- Penn"으로 통칭된다.)은 독립 후 미국인이 세운 최초의 종합대학이다. 설립자는 벤저민 플랭클린, 미국 건국사를 통틀어 가장 근면한 인물로 인식되는 인물이다. "근면", "정직", "절제" . . 어린 나이에 스스로 정한 도덕적 생활을 위한 수칙을 정해 놓고 극기의 수련을 쌓았던 그 감동적인 기록, 프랭클린의 『자서전』(Autobiography)은 출간 후 2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변함없이 미국 청소년의 필독서이다.

물론 이 대학의 교정 한복판에 프랭클린의 동상이 서 있다. 그 앞에서 아직도 많은 건실한 미국청년들이 경배의 선서를 아끼지 않는다. 서재필과 필립 제이슨( Philip Jaison)과의 '관계'를 묻는 필라델피아의 코메리칸 2세도 바로 이 동상 앞에서 미국민의 꿈과 자유가 아버지 나라에도 전파되었다는 자부심에 취해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고 웃었다. 입법, 행정, 사법부가 함께 자리한 필라델피아 시의 청사도 프랭클린의 발아래 건축되어 있다. 그는 가히 필라델피아의 수호성인의 지위를 누린다.

예로부터 필라델피아에는 유능한 법률가가 많다. 프랭클린의 영향인지 심오한 이론의 탐구보다는 실용적 지혜를 더욱 높게 평가하는 필라델피아의 전통이 대학에도 전승되고 있다. 이 대학의 법과대학을 세운 사람은 미국최초의 법학교수, 윌슨이다. 미국어 사전에는 아직도 "필라델리아 로이어"( Philadelphia lawyer)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는 "탁월한 논리와 명석한 분석력을 갖춘 유능한 법률가"라는 원래의 의미에다, "그러나 인간미가 결여된 사람"이라는 뜻이 부가되어 사용된다.)

1980년대이래 미국은 동성애자가 과연 일상생활을 함께 영위할 수 있는 '형제'인가의 논쟁으로 나라전체가 소란스럽다. 조나선 뎀 감독의 영화 《필라델피아》는 동성애와 에이즈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이다. 동성애를 '또 하나'의 '삶의 스타일'로 인정함으로써 주류사회와 에이즈 사이를 형제애의 가교로 연결하기 위한 시도로 이해된다.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의 목소리를 타고 서늘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영화의 주제가, 「필라델피아의 거리」( Streets of Philadelphia)를 해제(解題)하자면 미국인의 꿈과 현실의 괴리라고 할 수 있다.

인류사에서 동성애는 뿌리가 깊다. 아마도 인류의 역사 그 자체와도 연륜을 함께 했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진 거의 모든 땅에서 동성애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서구 근대문화의 뿌리로 인식되는 그리스 -로마시대에도 동성애는 굳이 소수라고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보편적인 남성의 삶의 형태였다. 동성애를 특히 금기시하는 서양의 전통은 유대-기독교의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기독교 경전에 특히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구절이 많은 것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어쨌든 오늘날에도 동서양의 주류문화에서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은 결코 곱지 않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동성애를 엄연한 형사범죄로 규정하였고, 범죄자는 아니더라고 최소한 정신이상자로 취급하는 나라는 무수하다. 그러나 범죄도, 정신이상도 아닌, 그저 '삶의 한 형태'라는 것이 동성애에 대한 미국의 공적사회의 공식입장이다.

그러나 법이라는 공적 규범에 무관하게 주류의 다수는 게이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와 질시와 차별을 감추지 않는다. "인류의 역병(疫病)"이라는 에이즈가 동성애자에게 준 타격은 크다. 1980년 대 이후 에이즈의 급격한 확산으로 동성애자는 결코 단순히 외면함으로 족한, 무해한 도덕적 소수자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재앙으로 몰고 가는 악의 무리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품는 사람도 늘어났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제작된 영화인만큼 『필라델피아』는 문제작이 될 수밖에 없다.

앤드류 베케트는 문자 그대로 젊은 "필라델피아 로이어"(Philadelphia lawyer)이다. 탁월한 논리와 명석한 분석력, 의뢰인을 존중하고 납득시키는 재주, 모든 면에서 그는 뛰어난 청년 법률가이다. 명문대 우등 졸업과 동시에 필라델피아 최대의 로 펌에 발탁된 그는 사무실의 대표변호사, 찰스 휠러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급성장 한다. 머지 않아 파트너 자리는 "따 놓은 당상(堂上)"이다. 스스로도 훌륭한 법률가라고 믿는 앤드류는 " 이따금씩 정의를 세우는" 일을 보람으로 산다. 그의 불행은 주류법률가와 다른 삶의 스타일 때문에 발생한다. 그는 동성애자이다.

사무실에서 갑자기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사무실은 앤드류에게 천문학적 액수의 저작권 침해 사건을 맡기고는 바로 며칠 후에 업무처리 능력과 태도를 문제 삼아 해고한다. 앤드류가 분명히 차질 없이 준비해 두었던 소장이 증발하는 이상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로 인해 하마터면 소장을 제때에 법원에 제출하지 못할 뻔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앤드류는 자신이 해고당한 진짜 이유는 동성연애자이며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 때문이라고 믿었다. 법은 에이즈의 감염 사실이나 동성연애자임을 이유로 해고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자신의 부당 해고 소송을 맡아줄 변호사를 구해 필라델피아 천지를 뒤졌으나 허사, 마침내 무명의 흑인 변호사 조의 사무실에까지 전락한다. 동성애자의 민권에 무관심하고 에이즈에 대에 무지한 조는 수임을 거절한다. 그러나 얼마 후 우연히 법대 도서관에서 혼자 소송을 준비하던 앤드류를 직원이 격리시키려는 것을 목격하고 연민의 마음에서 사건을 맡게 된다. 미국의 사법체계에서는 아무리 유능한 법률가라도 자신의 소송을 직접 수행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증거법상 운신의 폭이 좁고, 따라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입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변론기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회사측도, 원고 측도. "필라델피어 로이어"에 걸맞는 수준의 변론을 편다. 원고측 변호사 조는 앤드류가 에이즈 때문에 해고되었음을 입증할 책임이 있다. 먼저, 앤드류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 파트너 중에 한 사람이 앤드류의 얼굴에서 에이즈의 증상인 반점을 발견하고 연유를 물었다는 사실, 이에 대해 앤드류는 라켓볼에 맞았다고 대답한 사실을 집중해서 심문한다.

회사의 파트너들은 앤드류가 동성애자인 것도,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도 전혀 몰랐다고 대답한다. 휠러는 앤드류에게 중요한 사건을 맡긴 것은 그 동안 그에게 투자한 것을 회수하기 위해서였으나 날이 갈수록 앤드류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업무를 감당할 능력이 없음이 확인되어 해고했다고 증언했다.

회사측의 여자 변호사는 시종일관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앤드류의 약점을 파고든다. 심지어는 앤드류가 미구엘과 동서의 '연인'관계에 있으면서도 시내의 게이 영화관에서 처음 만난 파트너와 즉석 섹스를 했다는 사실까지도 고백하도록 유도해 낸다. 영화는 엄격한 의미의 법의 원칙을 벗어난 변론가 심문 장면을 담았고 있지만 전체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앤드류가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배심이 평결을 내린다. 그가 입은 정신적, 물질적 손해의 배상과 함께 회사가 저지른 악행에 대해 거액의 징벌적 손해 배상(punitive damage)을 명한다. 영화는 한 동성애자의 승리보다는 그 승리의 사회적 의미와 함께 승리의 원동력이 된 여러 형태의 '형제애'를 집중 부각시킨다. "내 아들이 버스 뒷자리에 앉아 있기만을 바라지 않았다." 라며 아들의 권리투쟁을 적극 조력하는 아버지와 가족, 법이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는 '연인' 미구엘의 눈물나는 외조, "문제는 법이 아니라 동성애 그 자체에 대한 편견이다."라며 법정 소란을 불사한 변호사 조의 개안 과정을 조명한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앤드류가 고전음악의 가락가락에 신과 인생의 의미를 해설하는 장면은 동성애자들의 섬세한 예술적 감수성을 부각시키는 압권이다.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안드레아 세니에』중 La Mamma Motra 전곡이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를 빌어 배우와 관객을 환몽 속으로 끌어들인다.

영화는 필라델피아의 건설자, 벤저민 프랭클린의 동상을 머리에 이고 선 장엄한 시 청사를 내리 비치면서 막을 내린다. 모든 미국인에게 건국의 아버지가 주창하던 '형제애'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는 과제를 남겨둔 채.

영화 속의 펜실베이나아 주법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대부분의 주에서 에이즈환자의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법과 연방법은 에이즈 혈액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반응해도 이를 직업적 능력이 저하된 증거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기초로 한 것이다. 뉴욕주 변호사, Geoffrey Bowers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세계 제1의 로 펌, 베이커 앤드 메켄지(Baker & McKenzie)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법적 절차를 재시했다. 분쟁은 난항 끝에 그가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죽은 지 7년 후인 1994년에 일차 결말이 났다. 뉴욕주 인권국은 로 펌에 대고 50만 달러를 보상하라는 조정명령을 내렸고 이에 불복한 펌은 정식 소송으로 맞섰다. 또한 바우어의 친척들은 영화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바우어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대가로 영화사가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다. "소송"이 에이즈보다 더욱 빨리 전파되는 역병(疫病)인지도 모른다.

<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l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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