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만화 '천국의 신화' 유죄 판결

  • 입력 2000년 7월 18일 18시 58분


법원이 만화 ‘천국의 신화’에 대해 음란성을 인정하면서 작가 이현세씨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해 ‘음란물’의 판단기준과 청소년 유해성 여부 기준을 둘러싸고 다시 논란이 일고 있다.

법원의 이번 판결은 음란물로 고발된 영화 ‘거짓말’에 대한 검찰의 무혐의 결정과는 외견상 상반된 것이어서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어떤 작품인가▼

‘천국의 신화’는 동북아시아 고대 신화를 바탕으로 창세기부터 환웅시대를 거쳐 발해 멸망까지의 역사를 그린 대하 역사만화. 이씨는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지 않던 혼돈의 시대에서 원시의 야만성을 버리고 인간본연의 영성(靈性)과 철학을 이끌어내 문명시대로 나간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말한다.

이같은 내용 때문에 작품 곳곳에는 여성이 구렁이나 늑대 등과 성행위를 하거나 원시부락에서 혼음하는 장면, 부락간의 싸움과정에서 몸에 많은 창날을 꽂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장면 등 ‘음란성’과 ‘폭력성’이 문제될 만한 부분이 포함돼 있다.

▼재판부의 입장과 논리▼

재판을 담당한 김종필 판사는 “성인들에게도 난해하고 선정적인 작품이 초등학생도 볼 수 있는 ‘소년용’으로 제작돼 배포됐다는 것은 청소년의 성욕을 자극하고 정상적인 성적 도의관념을 해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며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들에게 과연 이 만화를 보여줘도 괜찮을지를 따졌을 때 유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판사는 또 “일본만화 등 음란물 시비가 일고 있는 작품들이 봇물 터지듯 들어오는 마당에 보수적인 법원이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일정한 선을 그어줄 필요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즉 청소년용 작품인 만큼 미성년자들의 보호를 위해서 보다 엄격하게 판단해야 했다는 것.

이는 지난달 30일 영화 ‘거짓말’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검찰의 입장과는 차이를 보인다. 검찰은 “문화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시장과 소비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반면 법원은 “일반 독자들에게 유포된 작품은 개인적 예술의 자유를 넘어서 사회적인 영향을 미치는 만큼 한국만화계를 대표하는 이씨의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문화계 반응▼

문화개혁시민연대 심광현사무처장은 “기본적으로 ‘거짓말’과 다를 게 없는 ‘천국의 신화’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법원이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법을 들쭉날쭉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화가들과 문화예술계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이번 판결이 대중매체의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고 고사 직전에 놓인 만화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이다. 3차 일본문화 개방 이후 일본 만화가 물밀듯이 몰려오는 상태에서 한국 만화가들의 펜을 꺾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만화평론가 박인하(朴仁河·31)씨는 “이번 판결은 한마디로 만화에 대한 테러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수사 단계에서 항의의 표시로 절필 선언을 하기도 했던 이현세씨는 판결직후 항소하겠다고 밝혀 이를 둘러싼 법정공방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현세씨 일문일답▼

만화가 이현세(李賢世·44)씨는 18일 법원의 유죄판결이 내려진 후 “담담하다”고 말하면서도 “재판부의 판결은 극단적이고 비겁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음란성 혐의가 인정됐는데….

“각오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사회분위기가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법부가 자체적으로 기획수사한 사건인 만큼 쉽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죄판결이 나왔다면 보너스를 받았다는 느낌 정도였을 것이다. 담담하다.”

―유죄판결에 대한 소감은….

“예술과 창작의 자유 부분에 대해 재판부가 고뇌한 흔적은 보인다. 그러나 유죄판결을 내리기 위한 명분에 맞도록 논리를 억지로 짜깁기한 느낌이다.청소년들의 가치판단이라는 것은 어차피 유동적인 것 아닌가. 재판부가 너무 극단적이고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검찰의 경우 작가가 음란물을 만들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이유 등으로 영화 ‘거짓말’을 최근 무혐의처리했는데….

“사법부의 입장이 왔다갔다하는 것 같다. 예술작품을 사법부의 잣대로 판단하겠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한 누드작품을 놓고도 음모노출이나 특정부분의 노출여부로 포르노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찍는 사람의 의도로 판단하는 것 아닌가. 작가의 의도는 법으로 판단할 수 없다.” ―98년 약식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이후 작품활동에 변화가 있었는가.

“의식적으로 자기검열을 하게 됐다. 예술적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킬 때도 재판에서 어떤 영향을 받을지 생각하게 된다. 실형이나 벌금 차원을 떠나서 이는 작가에게 제일 심각한 문제다. 사회적 가치기준을 일일이 따져가며 작업하려다 보니 의욕이 안생긴다. 한국사람은 ‘신명’이 나야 일한다는데 재판과정은 나의 ‘신명’을 죽여버렸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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