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기자의 시네닷컴]'글래디에이터'

  • 입력 2000년 6월 13일 15시 10분


현재 흥행 1위인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규모 서사극이다. 우선 영화를 본 관객들이 갖게 될지도 모를 역사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자면, 실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들 코모두스에게 교살당한 게 아니라 기꺼이 코모두스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막시무스는 가상 인물이며, 난폭한 코모두스 황제가 죽고난 뒤 로마는 공화제가 꽃피기는 커녕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영화속 역사는 대부분 허구▼

그러니 이 영화가 은근히 깔고 있는 공화제에 대한 찬양은 실제 로마 역사에서 따온 것이라기보다 현대의 미국식 공화정치에 바치는 경배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원로원 의원에게 공화제를 확립할 것을 부탁하고 생을 마감하는 막시무스를, 미국 정치의 입지를 강화해준 걸프전의 영웅 콜린 파월에 빗댄 미국 평론가도 있었으니까.

각설하고, 이 영화가 관심을 끈 건 로마의 장군이었다가 코모두스의 치졸한 계략 탓에 검투사가 됐지만 와신상담 끝에 복수에 성공하는 주인공 막시무스의 특이한 성격 때문이다. 기념비적인 영웅과 도덕적이고 거창한 주제를 즐겨 다루는 대개의 서사극과 비교해 보면, 막시무스는 영웅의 고전적인 스타일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1960년의 대서사극 '스팔타커스’에서 역시 검투사인 스파르타쿠스는 노예해방의 신념에 차 억눌린 노예들을 싸움으로 이끈다. 또 '벤허’에서 귀족의 신분이었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뒤 복수에 성공하는 벤허의 인생 역정은 막시무스와 비슷하지만, 벤허에겐 유일신의 이상이 있다.

반면 '글래디에이터’의 음울한 영웅 막시무스에겐 아무런 이상도, 신념도 없다. 공화제에 대한 믿음조차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대한 충성에서 비롯된 것일 뿐 그 자신의 행동 동기는 아니다. 우울하고 사색에 잠긴 듯한 막시무스의 표정도 고뇌가 깃든 남성적 매력 이상의 아무런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변방의 검투 경기에서 잇따라 승리한 뒤 컴퓨터 그래픽으로 공들여 복원한 로마 콜로세움에 진출하는 막시무스는 서사극의 영웅보다 오히려 비디오 게임의 주인공, 원정경기에서 홈팀을 물리치는 현대의 스포츠 스타를 연상시킨다.

▼막시무스는 스포츠 스타 연상▼

엄밀히 말해 '글래디에이터’는 '30여년만에 할리우드에 부활한 서사극’이라기보다 서사극의 규모만을 빌려온, 스케일 큰 전형적 오락영화가 아닐까? 이는 어쩌면 루카치의 말처럼 “영웅이 세상을 인도하고 광명으로 존재하던 시대가 지나버린” 지금, 가장 적합한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유일신의 믿음을 되찾는 벤허적 승리, 해방의 가치를 역설하는 스파르타쿠스적 최후를 요즘 시대에 누가 보고 싶어하겠는가?

<김희경 기자>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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