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속의 작품]'나는 나를…'과 '마라의 죽음'

  • 입력 2000년 5월 30일 20시 30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처음은 다비드의 그림 ‘마라의 죽음’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물론 소설속 화자의 견해가 곧 나의 견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구절 속엔 그 무렵 내 세계관이, 삶의 강팍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에 대해 다시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떨림은 글쓰기라는 필터를 거쳐 고스란히 소설 속으로 잠겨버렸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작은 이렇다.

“1793년에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을 본다. 욕조 속에서 피살된 자코뱅 혁명가 장 폴 마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는 터번처럼 생긴 수건을 두르고 있고 욕조 밖으로 늘어뜨려진 손은 펜을 쥐고 있다. 흰색과 청색 사이에 마라가 피를 흘리며 절명해 있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정적이다. 어디선가 레퀴엠이 들려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를 찌른 칼은 화면 아래쪽에 배치되어 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 이미 여러 차례 그 그림을 모사(模寫)해 보았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마라의 표정이었다. 내가 그린 마라는 너무 편안해 보여서 문제였다. 다비드의 마라에게선 불의의 기습에 당한 젊은 혁명가의 억울함도, 세상 번뇌에서 벗어난 자의 후련함도 보이지 않는다. 다비드의 마라는 편안하면서 고통스럽고, 증오하면서도 이해한다. 한 인간의 내부에서 대립하는 이 모든 감정들을 다비드는 죽은 자의 표정을 통해 구현했던 것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의 시선은 가장 먼저 마라의 얼굴에 머문다. 그러나 표정은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선은 크게 두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 쪽 팔에 들려진 편지로 옮겨지거나 아니면 욕조 밖으로 비어져나와 늘어진 다른 팔을 따라간다.

죽은 마라는 편지와 펜, 이 두 사물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거짓 편지를 핑계로 접근한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된 마라는 답장을 쓰려던 참이었다. 마라가 끝까지 움켜쥔 이 펜이 차분하고 고요한 이 그림에 긴장을 부여한다.

마라는, 마라의 죽음은 멋있다. 격정이 격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최악의 비극적인 순간인 죽음조차 건조하고 냉정하게 대할 것. ‘마라의 죽음’은 예술가의 지상 덕목을 깨우쳐준다.

김영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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