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백기완씨/"'노나메기'세상 펼쳐보자"

  • 입력 2000년 5월 21일 20시 37분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The Decline of the West)이란 책에서 '나는 니체에서 문제제기를 받고, 괴테에게서 방법을 얻었노라'고 했습니다. 슈펭글러는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에게서 문제제기를 얻었다지만, 젊은이 여러분들은 현재 어디에서 문제제기를 얻고, 방법을 찾습니까? 혹시, 가상(사이버)세계는 아닙니까? 끊임없이 죽이고 승리해야 하는 자본주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게임공간에서 뭔지도 모를 허상과 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통일꾼 할아버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한양대 안산캠퍼스 경제학부 500여명의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17일 이 학교 '겸임교수'로 임용된 재야 운동가 백기완(白基玩·67·통일문제연구소장)씨의 '21세기 세계와 한국' 특강. 백씨는 21세기에도 계속돼야 할 인류진보와 변혁의 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학생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이날 김종량총장으로부터 1년 임기의 '겸임교수' 임명장을 받았다.

▼"사이버 허상과 왜 그렇게 싸우나" ▼

“허허, 평생 공식 직함이나 월급 한번 받아본 일 없이 제도권 밖에서만 살아온 내게 교수자리라니….”

1987년과 92년 대통령선거에 '민중후보'로 거푸 출마했던 일을 빼놓고는 평생 노동자운동 농민운동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을 해 온 백씨였기에 뜻밖의 '대학교수' 임용에 본인 스스로 놀라고 감격했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것이 전부. 황해도에서 독립운동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머슴보다도 가난하게' 살았었기에 독학으로 배움을 얻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은 어느 시에 보면 '해방이란 두글자를 깨우치는데 30년이 걸리고…'라는 구절이 나오지. 일생동안 나에게 누가 이런 책을 읽으라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어. 그저 길거리에서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면서 살아왔지. 질풍노도의 역사적 현실에서 문제제기를 얻고, 방법론을 깨우쳤던 그 과정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야.”

50년대 달동네 야학과 나무심기 운동을 시작으로 각종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정권으로부터 '빨갱이' 명목으로 숱한 고문과 탄압을 받아왔던 백기완. 일평생 그를 지켜온 사상은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그는 한마디로 “나는 '노나메기' 주의자”라고 대답한다. '노나메기'는 최근 그가 창간한 계간학술지 이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사회주의 인간형'을 최고의 인간형으로 이야기했지만, 그 실험은 공산권 몰락으로 실패했지. 나는 우리의 전통적 공동체 사상인 '노나메기'야 말로 인간 발전형태의 최고봉으로 꼽고 있지. '노나메기'는 '너와 내가 모두 다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이야. 미국이나 일본이 잘 산다고 하지만 올바로 잘 살지는 않지. 빈부격차와 환경오염없이 모두 함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 '노나메기'의 세상이야.”

▼"제도권서 대접해주니 만감교차" ▼

74년 유신반대운동을 하다 수사기관에 잡혀갔을 때 함께 조사받던 장준하선생이 수사관들에게 “우리 민족문학의 '보고'(寶庫)요 천재인 이 사람에게 손을 대면 결코 조사에 협조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백씨는 평생 잊혀져 가는 우리 춤, 굿, 소리, 그림, 설화를 찾아다니며 세상에 알려왔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를 '민중 딴따라'의 애칭으로 부른다. '동아리' '새내기' '달동네' '새뚝이' 등 아름다운 우리말을 널리 쓰이게 한 것도 백씨. 그는 “상업주의와 자본주의 문화에 물들어 '꿈과 이상'마저 파괴된 젊은이들의 허무주의를 깨뜨리기 위한 문화적인 예술적인 노력이 없이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며 정치적인 내용보다는 민족문화의 힘에 대한 내용을 강의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군부독재 시절 노동자와 학생들이 선동을 위해 '선생님'으로 모실 때를 빼놓고는 제도권에서는 한번도 대접을 받아본 일이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 겸임교수가 돼 연구비 지원도 받고, 학생들 앞에서 목청껏 강의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의 '고무신'도 최근에는 '구두'로 바뀌었다. 그는 곧 열릴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김대중 김정일 두 사람은 '외교적 만남' '실리적 만남'을 가질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만나야 합니다. 대통령이나 국방위원장이란 명예와 권위로 만나지 말고, 피눈물의 분단의 역사를 마주한 무지랭이 민중으로서 만나야 합니다. 남북이 하나되어 '노나메기'의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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