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한기흥/前대통령의 品位

  • 입력 2000년 4월 26일 18시 57분


미국을 방문 중인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이 25일 워싱턴 주재 한국특파원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1시간 반 동안 열린 간담회 내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비난했다.

“김대중이는 너무 거짓말을 잘한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애들 교육이 큰일이다. 거짓말 잘하는 X도 대통령이 된다고 애들이 생각하면 큰일 아니냐.”

김전대통령은 한번도 ‘김대중씨’나 ‘김대중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치적 반신불수’와 같은 표현을 써가며 김대통령을 혹평했다. 김대통령이 야당과 언론을 파괴하고 호남 출신으로 주요 권력기관의 요직을 싹쓸이하다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 그의 발언 요지였다.

김전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것도 “김대중이가 금융개혁의 핵심인 한국은행법 개정에 반대하고 특히 기아사태와 관련해 ‘국민의 기업을 살려야 한다’며 기아자동차의 매각에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자신이 군부의 하나회를 척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이는 대통령에 취임도 못했을 것이고, 대통령이 된 뒤에도 쿠데타가 여러 번 났을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김전대통령은 간담회를 마칠 때 자신의 발언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고상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김대중이 욕한 부분은 잘 좀 써달라”고 부탁한 뒤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김전대통령은 이날 미국의 지미 카터 전대통령처럼 활동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카터 전대통령은 물론 대부분의 선진 민주국가에서 전직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을 공식석상에서 김전대통령처럼 심하게 공격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김전대통령이 김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라면 남을 비판하더라도 좀더 품위 있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한기흥(위싱턴특파원)eligiu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