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육정수/동전시위

  • 입력 2000년 3월 30일 19시 44분


우리나라에서 상품교환 수단으로 동전이 널리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1600년대 후반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동전의 필요성에 대해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았다. 실학의 거두 유형원(柳馨遠)과 정약용(丁若鏞)은 동전을 적극 옹호하는 주전론(鑄錢論)의 입장에 섰다. 반면 이익(李瀷)은 동전의 유통금지를 주장했다. 영조는 이익의 주장에 동조해 한때 동전유통 제한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익은 “동전은 탐관오리들과 도적들에게는 편리할지 모르나 농민들에게는 소비성향과 뇌물을 바치는 고통만 높인다”며 물물교환 시대로의 복귀를 촉구했다. 사실 동전이 나오기 전에는 관리들이 뇌물을 받는 일이 쉽지 않았다. 화폐 대용품인 쌀이나 포(布)는 부피가 커 운반하기 어렵고 남의 눈에 띄기 십상이었다. 동전이 보급되면서 대낮에도 뇌물수수가 성행하게 됐다니 이익의 주장도 이해할만하다. 뇌물전달 수단이 지게나 우마(牛馬)에서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전대(錢袋)로 바뀐 것은 편리함에서 가히 혁명적이었다.

▷지폐나 수표에 비하면 동전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교환수단이다. 이젠 종이도 필요 없는 전자화폐시대를 맞고 있다. 이런 때에 진보적 성향의 두 총선후보가 등록 첫날인 28일 기탁금 2000만원을 내는데 트럭을 동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고액권 수표로 내는 게 보통이련만 한 후보는 100원짜리 5만7000개와 500원짜리 2만8600개의 동전을 38개의 자루에 담아 선관위에 냈다. 무게로는 530kg. 은행 손을 빌려 액수를 확인하는 데만 2시간여가 걸렸다고 한다.

▷이 깜찍한 젊은 후보들은 “기탁금제는 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제도”라며 항의표시로 동전시위를 벌였다고 했다. 기탁금은 현행법상 ‘유효투표총수의 20% 이상 득표’ 등 요건에 미달하면 국고로 들어간다. 15대 총선 때는 지역구 후보 1389명 중 608명(44%)이 기탁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기탁금이 2배로 뛴 데다 반환요건도 훨씬 까다로워져 후보 대다수가 생돈을 날릴 처지에 놓여 있다. 후보 난립을 막자는 취지겠지만 돈 없는 후보들의 외침에도 귀를 열어야 한다.

<육정수 논설위원>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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