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Science]성폭력은 왜 일어나는가

  • 입력 2000년 3월 19일 20시 08분


최근 랜디 손힐 박사와 크레그 파머 박사가 자신들의 책 ‘강간의 자연사:성적인 강압의 생물학적 기반’에서 강간은 진화에 뿌리를 둔 성적인 행동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격렬한 논란이 벌어졌다. 특히 이들의 주장에 비판을 가한 것은 많은 여성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이 두 학자의 주장은 사실 학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각들을 분명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오늘날 인간들의 행동 중 대부분이 원시시대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생각은 이미 대중문화 속에 널리 퍼져 있다. 일부 연구에서는 대중들의 이러한 고정관념을 뒷받침하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남자들은 일부다처주의자들이고, 여자들은 일부일처주의자들이다” “여자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경제적인 부와 지위를 중시하고, 남자들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중시한다” 등이 이런 고정관념의 한 예이다.

▼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 ▼

그러나 이런 고정관념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학자들을 단순히 대중적인 관심을 끌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사실 오늘날의 세상과는 매우 달랐던 수백만년 전의 세상에서 우리 조상들이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를 진화 심리학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인간의 정신이 일종의 ‘다목적 컴퓨터’와 같아서 인간이 태어난 다음에 부모, 학교, 문화 등이 입력해주는 프로그램을 그냥 받아들인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인간의 정신은 미리 모든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으며 이 프로그램들이 특히 배우자를 고르거나, 성적인 경쟁자를 물리치거나, 먹어도 안전한 음식이 어떤 것인지를 결정할 때 개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이처럼 복잡한 정신적 메커니즘을 결정하는 유전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유전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이 유전자들의 환경적응력이 강해서 인간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므로 이 유전자들이 더 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기 2000년의 세상에서는 이 유전자들의 환경 적응력이 반드시 강하다고 볼 수도 없고 이 유전자들에 의해 결정되는 행동을 반드시 장려해야 한다고 볼 수도 없다.

예를 들어 먼 과거에는 강간이 인간의 환경적응력을 높여주는 행위였다는 손힐 박사와 파머 박사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강간이 지금도 용서할 수 있는 행위라거나 엄중한 처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 인간정신은 다목적 컴퓨터 ▼

사실 진화 심리학은 지금까지 다른 학자들로부터 성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 또한 일부에서는 이론과 사실을 뒤섞어서 아전인수격으로 이용하기를 좋아하는 정치가들과 이익 집단들이 진화 심리학자들의 주장을 이용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고 있다.

사실 인간의 행동을 유전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오용된 사례는 많다. 우선 19세기에 성행했던 ‘사회적 다윈주의’라는 이론은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살짝 비틀어서 계급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이 곧 ‘적자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었다.나치 역시 다윈의 이론을 마구 확장하고 비틀어서 인종말살 정책의 근거로 내세웠다.

다윈 이론은 이밖에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강제불임수술을 하자는 운동이나 인종차별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 진화론적 사고의 위험성 ▼

진화 생물학의 전신이자 사회적 다윈주의의 직접적인 후계자인 사회생물학을 앞장서서 비판해온 사람 중의 하나인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이 갖고 있는 특징들 중에는 적자생존의 산물이 아닌 것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버스 박사는 “진화론적인 가설의 경우 많은 증거를 모아야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진지한 반응을 얻어낼 수 있으나 남녀간 차이등에 관한 가설의 경우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어도 모두들 쉽게 받아들인다”고 비판했다.

(http://www.nytimes.com/library/national/031400hth-behavior-evoluti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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