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칼럼]1천만원의 영국 30억원의 한국

  • 입력 2000년 3월 17일 22시 26분


영국에는 “택시 운전사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이 국회의사당”이라는 조크가 있다. 택시를 자주 이용하는 국회의원을 태워보았자 팁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왜 팁을 주지 않을까? 수입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월수입이 평균 500만원 정도이니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다양한 활동을 벌여야 할 국회의원의 씀씀이를 고려할 때 많다고 하기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월수입 두달치로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선거비용이 적게 든다. 따라서 선거비용을 마련하느라고 정경유착이나 권력형 비리를 저지를 필요가 없으며 설령 낙선했다고 해서 빚더미로 패가망신하는 일도 없다.

▼두달치 월급으로 선거치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필자는 93년 여름에 영국에서 한 국회의원 보궐선거 과정을 지켜본 일이 있었다. 글자 그대로 깨끗했다. 한 유권자가 자기 집 정원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를 초청하고 이 사실을 주변에 알린다. 많이 모이면 20∼30명, 적게 모이면 약 10명. 후보자와 유권자들의 대화는 30분 정도. 이때 콜라나 주스를 마시며 비스킷을 몇 조각 씹는 것이 보통인데, 이 다과는 초청자가 모두 부담하거나 또는 참석하는 유권자들이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간다. 민주화투쟁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이후만 따져도 몇몇 재선거 또는 보궐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무리하게 운동한 경우엔 약 50억원을 썼다고 하며, 이번 4·13 총선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20억원을 쓰면 낙선하고 30억원을 쓰면 당선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후보자 여건에 따라서는 50억원을 쓴다는 말도 들린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에서 정권을 장악하거나 유지하는 도구가 자유당정권 때는 관권이었다. 주로 행정관료들과 경찰관들을 앞세워 야당을 탄압하고 국민을 위협해 선거에서 ‘승리’하곤 했다. 그 다음에 나타난 도구가 무력이었다. 5·16쿠데타와 유신쿠데타, 그리고 12·12쿠데타와 5·18쿠데타가 그 보기들이다. 그러나 쿠데타로 집권했던 대통령들의 피살과 유죄판결은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무력이 집권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관권으로도 무력으로도 집권이 불가능한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리하여 국민의 투표가 집권의 열쇠로 바뀐 시대가 자리잡으면서, 이번엔 돈이 가장 중요한 도구로 위세를 떨치기에 이르렀다.

그 엄청난 큰돈은 어떻게 마련된 것일까? 사재를 쓰는 후보도 있을 것이며, 합법적인 후원금이나 중앙당의 지원금에 의존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검은 돈’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재라고 해도 선거에 대비해 부정하게 축적해놓은 돈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큰돈을 쓰고 당선된 사람은 임기 4년 동안 그 액수만큼 또는 일부라도 ‘회수’하기 위해 부당한 방법에 의존하려는 유혹을 강하게 느낄 것이다. 여기서 주로 정경유착 또는 권력형 비리의 고리가 형성돼 왔음을 우리는 자주 보았다.

▼돈 쓴다는 것 자체가 불법▼

여기서 새삼스레 강조돼야 할 것은 그렇게 많은 돈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후보들의 대부분이 사실상 범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어찌 선거운동 비용뿐이겠는가. 다른 여러 분야에서 범법이 공공연히, 또는 교묘하게 저질러진다.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해 운동하는 일 자체가 범죄권에 들어간 것이라는 세평이 한낱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을 탓한다. 돈을 요구하는, 또는 돈을 써야 움직이는 ‘더럽고 타락한 유권자들’ 때문에 별도리가 없다고 항변한다.

미국의 켄트주립대학교 정치학과는 선거운동 한 분야만을 놓고 석사학위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선거운동 과정 전반이 민주적이고 합법적이며 투명해야 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관한 연구가 더 깊이 있게 이뤄져야 한다는 믿음에서 이 학위과정은 출발했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대에는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수평적 정권교체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선거운동 과정 전반의 민주화와 투명화로 진전돼야 할 것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후보자도 유권자도 모두 오늘날의 망국적 행태와 혼탁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 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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