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정형근의원의 묵비권

  • 입력 2000년 2월 18일 19시 23분


그저께 검찰에 자진출두한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은 밤샘조사를 자청하면서도 거의 묵비권(진술거부권) 행사로 일관했다는 보도다. 그동안 줄곧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던 정의원이 처음으로 검찰에 나간 것만으로도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입을 통해 언론대책문건 사건 등에 대한 진실의 실마리가 풀리기를 기대했던 국민은 실망했다. 기왕 검찰조사에 응했다면 밝힐 것은 밝히고 해명할 것은 해명하는 적극적 자세가 온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물론 묵비권은 법으로 보장된 피의자의 정당한 권리다.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굳이 진술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정의원의 경우는 일반 피고소인들과 다르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언론대책문건 사건, ‘서경원(徐敬元)사건’ 재수사 및 ‘빨치산 발언’사건, 이근안(李根安)의 고문 배후혐의 등 그가 관련된 고소고발 사건은 모두 지난해말 여야간에 첨예한 쟁점이 됐던 것들이다. 따라서 그 진상은 사건 당사자뿐만이 아닌 전국민의 관심사항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는 언론대책문건 사건 폭로의 장본인이다. 진실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야할 공적(公的) 책임이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정의원이 묵비권 행사의 이유로 내세운 말도 이해는 된다. ‘정치권력의 사주에 따른 표적수사’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뜻인 것 같다. 우리는 총선을 2개월 앞둔 예민한 시기에 검찰이 현역 국회의원을 체포영장도 없이 전격 연행하려 한 것은 석연치 않다는 점을 들어 정치적 외압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그 때문에 검찰은 공정하고 정치 중립적인 자세를 잃지 말라고 촉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의원이 기왕에 스스로 검찰에 걸어 나간만큼 정정당당한 진술로 정치적 쟁점을 줄여나가려는 자세를 보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특히 언론대책문건 사건은 지난해말 여야가 국정조사를 하기로 합의까지 했다가 실종돼 버린 중요현안이다. 또한 검찰의 수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더니 어느새 실체가 오간데 없어진 사건이다. 열쇠를 쥔 문건작성자 문일현(文日鉉) 전중앙일보 기자는 그 사이 유학중인 중국으로 출국하고 말았다. 따라서 현정권에 의한 ‘언론장악 음모’가 실재(實在)했었느냐는 이 사건의 본질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의원마저 입을 다문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정의원은 더 이상 검찰 소환에 응하지 않을 모양이다. 검찰은 나름대로 수집한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공소제기 여부를 판단하면 되겠지만, 피차간에 민감한 총선을 치르고 난 뒤에라도 실체적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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