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18)

  • 입력 2000년 1월 7일 19시 53분


우리가 철통 같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는 거 하구, 북쪽이 유럽이나 미국 보다는 훨씬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에 놀랐지.

그런 당연한 소리를….

이 선생은 아무 말도 없이 빙그레 웃고만 있었어요. 그는 웬만한 일로는 자기 생각을 잘 꺼내지 않으니까요. 하여튼 다시 서베를린 구역으로 넘어 와서야 나는 우리가 잠깐 궤도를 벗어났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그는 돌아가겠다고 했고 차에 오르기 전에 내가 그에게 말했어요.

미안해, 모처럼 왔는데 잘 해주지 못해서.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길 건너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어요.

한 형 보구 싶었어. 잘 지내.

이 선생과 영태가 악수하고 그는 내게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는 차를 몰아 가 버렸어요. 이제 나는 비로소 이 선생과 다시 둘만 있게 된 거예요. 나는 그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따뜻한 그의 손을 꼭 쥐고 걸었어요. 그가 물었어요.

어디로 가지?

오늘은 우리 집 가요.

24

십이월 초였는데 그 때에는 서베를린의 인파는 일상이 되어 버렸죠. 지하철에도 관광객과 동독 사람들과 심지어는 폴란드 체코 사람들까지 몰려 들어서 서울이나 동경의 출근 전철 같았어요. 제국의회 건물 부근의 공터에는 동구 사람들의 벼룩 시장이 섰구요 자동차 도난 사고도 많아졌지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생긴 것도 그 무렵이었어요.

어느 겨울비 오는 밤에 한 젊은이가 장벽을 넘어 왔어요. 아니 장벽을 넘어 왔다기 보다는 무너진 벽 틈으로 흘러 나왔겠지요. 그는 혼자서 동물원 역에 내렸어요. 소시지 끼운 브뢰첸 빵을 사들고 낡은 우산 하나만 달랑 들고서 그는 쇼 윈도우 구경도 하고 누드 쇼를 하는 핍 쇼 하우스 앞에서 사진을 열심히 들여다 보기도 했어요. 그는 그냥 도심지의 엄청난 사람들 틈에 끼어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겠지요. 동독 사람들은 차츰 누드 쇼를 어떻게 구경하는지 한 둘씩 알게 되어 그맘 때에는 줄지어 들어가서 가진 동전을 몽땅 털어 버리고 나오곤 했지요. 한 사람에게마다 눈을 갖다 댈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 옆에는 관광지에 설치된 망원경처럼 동전 투입구가 있고 타임 체커가 돌아가게 되어 있대요. 작은 방이 보이고 맞은편에 도어가 보이고 문이 열리면서 여자가 들어와 옷을 한 가지씩 벗으면서 스트립 쇼를 한 대요. 타임이 초과되면 찰칵하면서 시야가 차단되는데 다시 동전을 넣으면 앞이 보이게 되지요. 그는 동전을 꼭 한 개만 넣고 쇼를 보다가 분개해서 돌아서 나오기도 했죠. 그는 불빛이 휘황해서 지하철이 끊기는줄도 모르고 돌아다녔어요. 동물원 역으로 되돌아 가보았지만 노숙자들만 보였어요. 그는 당황해서 이쪽 출구에서 저쪽 출구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빈 철길만 확인하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고 하다가 그야말로 자신이 돌아갈 출구를 영영 놓쳐버리고 만거예요. 방향도 모르고 네거리를 건너서 가다가 길가에 섰는 여자들을 보았어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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