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이끈 潮流/미술]캔버스 밖 실험정신

  • 입력 1999년 12월 22일 19시 00분


《20세기의 미술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추상미술의 등장, 새로움에 대한 집념,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심, 스타미술가들의 탄생, 고급미술과 대중문화의 경계허물기, 미술애호가 층의 대중화 등등이 20세기 미술을 대변하는 다양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20세기 미술은 다른 어느 세기보다 혁신과 급진적 변화의 연속이었다. 이처럼 엄청난 변화속에서도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술의 영역, 혹은 미술가의 과제가 ‘인간의 경험과 삶의 표현’이라는 기본적인 전제다. 그렇다면 20세기의 재능 있는 수많은 미술가들의 미술활동과 다양한 실험들, 그리고 그로부터 얻어낸 성과들은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 그들의 미술은 삶속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가?》

20세기 벽두에 피카소는 파편 같은 작은 형태들의 조각으로 구성된 입체주의 작품을 그려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그의 작품들은, 19세기까지 미술에 대해 지배적이었던 관념, 즉 미술은 세상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체주의 양식은 급격한 근대화와 도시화, 그리고 과학발달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고 있던 미술가들에게 변화된 삶을 표현하는 새로운 미술의 형태로 수용되었다.

피카소는 추상회화의 선구자였지만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여전히 인간이었고 작품의 주된 주제 역시 인간이었다. 캔버스에서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순수한 색채와 선, 형태만으로 된 미술이 나타나는 것은 1910년대였다. 활동무대는 모두 달랐지만, 뮌헨에서 활약했던 칸딘스키, 네덜란드의 몬드리안, 그리고 러시아의 말레비치는 모두 사실적인 미술은 오래된 서구문명의 부패와 물질주의를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회개혁을 위한 주도자로 인식한 후, 순수한 색채, 형태, 선으로 구성된 새로운 미술이야말로 미래의 유토피아적 정신과 환경을 나나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추상미술은 단순히 형식상의 혁명이 아니라 당시 미술가들의 세계관 자체였으며 미래에 대한 비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 미술이 인간의 진보와 기계문명에 대한 신념에 근거하고 있었다면,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어난 다다운동과 1924년 파리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 미술은 인간의 내면 깊이 숨어있는 어두운 측면과 부조리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인간의 소외와 억압에서의 해방을 꿈꾸던 움직임이었다.

한편 1930년대에는 미술과 정치가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추상미술의 난해한 이미지 대신 일반인들이 알아보기 쉬운 사실적 이미지가 중요한 요소로 재등장한다. 미국의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들은 농촌, 또는 도시 노동자들의 사실적인 이미지를 통해 사회와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수행했다.

또 나치 독일은 신고전주의적이고 영웅적인 인체미술을 통해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보여주려 하였으며, 소련에서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미술을 후원하면서 예술을 정치와 이념의 선전도구로 삼았다. 그러나 이렇게 구상미술이 일부국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자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사실적인 미술은 나치와 소련의 미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배척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단순히 보수적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미술로 이해되면서 추상미술이 주도하는 미술계의 주변에 머무르게 되었다.

제2차 대전 이후 모더니즘 미술의 중심지는 미국으로 옮겨갔다. 전후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국으로 비쳐진 미국의 주요 미술가들은 폴락이나 드 쿠닝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었다. 50년대 후반 추상미술은 이제 가장 보편적인 양식으로 인식되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바로 이 무렵부터 순수추상이 지나치게 우리의 삶과 유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반발하면서 미술과 생활을 결합하고자 하는 시도가 젊은 미술가들 사이에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팝 아트는 60년대 이후 대량소비 시대의 도래로 인한 일련의 변화를 결정적으로 보여준 미술이었다. 팝 아트는 만화나, 광고, 간판 이미지 등 이제까지 순수미술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화면안으로 들여왔다. 워홀은 깡통의 제품 디자인이나 마릴린 먼로와 같은 스타들의 이미지들을 그대로 도입하는 방법을 써 이제까지의 미술작품에 부여된 독창성과 유일성이라는 아우라를 제거해 버렸다.

기존의 제도와 권위, 표준, 생활방법에 반발하는 이러한 움직임이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된 것은 60년대 말로 이 시기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점이었다. 미술계에서도 이제까지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에서 대중문화, 제3세계, 여성 미술과 같은 다양한 그룹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고 미국이라는 중심을 탈피하여 유럽, 남미, 아시아 등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울러 지난 1세기 동안 미적 평가의 주된 기준이었던 형태, 작품의 질에 대한 관심이 내용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면서 다양한 삶의 경험과 노출이 중요시되었다. 회화나 조각 등의 기존 미술형태에 대한 대안으로 미술가들은 좀 더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고, 미술의 상품화에 반발해 스튜디오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작업을 하는 대지미술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후 80년대에는 대중매체의 위력이나 페미니즘,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이론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권력의 의미, 미디어의 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의 여성성의 문제 등에 대한 작품들이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이제 반 고흐와 같이 일생 그림 한 점 밖에는 팔 수 없었던 불쌍한 예술가의 이미지는 과거의 이미지가 되었으며, 현대미술가의 이미지는 대형건물의 조형물 작업을 따내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PR하는 사업가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현대미술의 큐레이터는 새로운 미술가를 발굴하기 위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게 되었으며, 화려한 화집과 출판물들은 미술 애호가들의 층을 두텁게 만들었다. 미술전시도 미술관이나 화랑에 국한되지 않고 지하철역, 공장, 공원 등 우리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으로 확장되었다. 충격적인 미술의 형태는 바로 수용되었으며, 낯설게 보이던 미술작품도 재빨리 투자의 대상으로 전환됐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지금 가상현실, 사이버 공간, 유전공학 등은 더 이상 전문가들의 실험단계에 머무르는 먼 미래의 것이 아닌 바로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따라서 첨단 테크놀로지 시대를 살아가는 미술가가 수행해야 할 삶의 시각적 의미화는 피카소나 워홀이 살던 시대와는 달라 질 수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사진의 발명에서부터 미술과 기계의 관계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21세기의 미술 방향은 이 테크놀로지와의 관계에서 많이 좌우될 것 같다.

김영나(서울대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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