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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12월 21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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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 일어나, 문 열어요. 누가 왔어요!
다시 오랫동안 벨이 울렸고 나는 후둘거리는 다리로 버티면서 한 칸씩 로프트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방문 앞의 불을 먼저 켰어요.
마리예요?
그때 외국어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렸지요.
접니다.
나는 문을 열었죠. 거기 잠옷 위에 숄을 두른 마리와 이 선생이 함께 서 있는 거예요.
웬일이예요?
하면서 나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문 뒤로 몸을 반쯤 숨기면서 중얼거렸어요. 나는 남자 같은 커다란 파자마에 머리는 베개에 눌려서 사방으로 뻗치고 안색은 아마 누렇게 한꺼풀의 우거지 상을 쓰고 있었을 겁니다.
정말 괜찮은 거요?
이 선생이 문을 밀고 방 안으로 들어서려다가 뒤를 돌아보고 마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인.
비테 쉔,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이 선생은 가차없이 방문을 닫았지요. 그는 한 손에 뭔가 꾸러미를 들고 있었어요. 그는 서슴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었어요.
어서 올라가서 누워요. 독감은 약이 별로 없다구. 몸을 따뜻하게 하고 계속해서 푹 자는 거요.
이상하지요, 우리 말이며 남자의 음성을 듣는데 어쩐지 속이 따스해지고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나는 그를 남겨 두고 로프트의 사다리로 올라갈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원에 나갈 때 지니고 다니던 파란 첵크 무늬의 모직 담요를 몸에 두르고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았어요. 그는 내 방에 여러번 드나들었던 사람처럼 부엌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어요. 나는 약해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그에게 말을 걸었구요.
뭘 하시는 거예요?
응, 이거 한국 식품점에서 몇 가지 사왔는데… 우리 식으로 처방을 합시다. 얼큰한 콩나물 국 하구, 전복이 없더라니까, 그래서 잣죽을 쑤어 줄 거요.
나는 기가 차서 작은 소리로 웃어 버렸어요. 그가 지하철에서 만났을 때처럼 내게 손가락을 세워서 흔들어 보였지요.
내 취미를 방해하면 그냥 안 놔둘 거요. 거기 꼼짝말고 누워 있어요.
좋아요, 헌데 지금 몇 시나 됐어요?
저녁 아홉시 조금 지났군요.
부엌 문이 닫히고 문 틈으로 불이 켜지는 게 보였어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싱크대의 수납장 문이며 설합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며 도마질 하는 소리들이 아늑하게 들려와서 나는 이제 집에 돌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상상에 빠졌습니다. 수돗물 흘러 내리는 소리. 나즈막한 휘파람 소리도.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구수한 냄새가 부엌에서 새어 나왔어요. 그야말로 옛날 부뚜막에서 새어들던 냄새 말예요. 부엌 문이 열리고 나는 웃음을 터뜨리다 기침을 하고 말았지요.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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