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01)

  • 입력 1999년 12월 19일 18시 47분


일꾼은 어째서 소의 마릿수만 세었을까, 그래서 소가 죽는 것도 몰랐다, 울타리에 가지 않았더라도 소는 틀림없이 죽었을 거다, 그렇게 중얼거렸대요. 양적 측면에만 정신이 팔려 있으면 지옥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만물을 단위로 해서 획일적으로 취급하면 극히 중요한 사물을 만들거나 부수거나 하는 질적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해요.

만일 각각의 소를 질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소는 병이 든 것 같다, 하고 말할 수 있었을 거요. 또 다른 농장의 일꾼이 양의 숫자를 세라는 임무를 맡았어요. 일꾼은 양을 우리 안에 넣었는데 양은 그곳을 뛰쳐 나갔어요. 양이 전부 뛰쳐 나간 뒤에 주인이 몇 마리냐고 묻더래요. 일꾼이 대답했어요. 몇 마리인지는 모르지만 뿔이 짧은 놈 한 마리가 없어진 것만은 알고 있다구요. 그 일꾼은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모두 알고 있었던 거죠. 양의 숫자를 셀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물질에 치우친 효율이라는 개념은 규모경제라는 신화로 이어집니다.

전문화하면 할수록 분업화하면 할수록 획일적으로 되면 될수록 그리고 배려가 결여되면 될수록 생산이 대규모화 하고 더 한층 복잡해지고 더욱 자본집약적으로 되고 더 한층 폭력적으로 되잖아요.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생산성의 신화에 사로잡힌 채로 시작한 건 마찬가지요. 풍족한 사회, 풍족함이 순간적인 일에 낭비되는 사회는 세계 전체의 모델이 될 수 없지요.

풍족한 사회의 규범은 세계를 향해서, 우리의 기술과 우리의 개발 방법을 따르기만 하면 당신들도 작은 미국, 작은 유럽, 작은 일본처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건 모두의 재난입니다. 다른 모델이 필요해요. 겸허하고 단순하고 생명력 있는 주체의 구체적 변화가 없이는 시스템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노동과 자본에 관한 우리의 오랜 인문적 호소는 결국은 시스템 내부에 그치고 그것을 변화시킬 만한 힘은 갖고 있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자신이 하고픈 일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많이 이끌렸습니다. 그는 우리들하고는 다르게 현실 상황에 대하여 얼마간 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당시에는 그의 말이 추상적으로 들렸던 게 사실입니다. 아무튼 그는 먼 이국 땅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된 셈이죠.

유월이 되어 날씨가 변덕이 심해졌을 때 나는 몹시 앓았어요. 앓으면서도 나는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에 나는 주변에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벼락 같이 병이 찾아와 탈진되도록 앓고 일어나곤 했거든요. 어린아이들은 한번씩 앓을 때마다 몸도 마음도 성숙해 가는 법이지만 어른인 나는 어쩌면 노화와 쇠락으로 가는 게 아닌지.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봄 비가 감미롭게 새싹을 키우는 것과 가을 비가 땅 속 깊은 뿌리를 든든히 해주는 것과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 더 아래로 내려갔으면 했어요.

로프트에 있는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털 달린 슬리핑백 위에다 시트를 씌운 담요를 두 장씩이나 덮고도 이를 딱딱 마주치며 떨었어요. 옆 집 마리 할머니가 눈치를 채고는 양파 스프를 끓여 오고 카밀레 차에다 위스키를 넣어서 가져다 주기도 했어요. 그는 밖으로 내민 내 목에다 털실 머플러를 둘러 주며 말했지요.

이제 유니도 베를리너가 되려고 그러는 거야.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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