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75)

  • 입력 1999년 11월 18일 18시 06분


그들은 번화가는 물론이고 미군 부대 앞에까지 진출했다. 나는 미경이의 집을 다시 찾아갈 수는 있었지만 보안 때문에 내게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내쪽에서 찾아선 안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팔십칠 년 봄에 나는 대학원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지방대학에 강사 자리를 얻어서 일 주일의 이틀을 지방에서 보내다 오곤 했다. 봄부터 각 지방에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시작 되었으며, 이어서 초여름에 이르도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규탄과 호헌철폐를 위한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유월에 이르러 항쟁은 차츰 대단원을 향해서 치달려 갔다. 나도 어쨌든 동창들 관계로 사회문화 단체에 적을 두고 있어서 그 무렵에는 여러번 불려 나갔다. 백발 노인이 되어버린 선배들부터 우리 같은 여성들에 이르기까지 시민 시위대는 종로에서 명동으로 시청 앞에서 서울역으로 차도에까지 발 딛을 틈도 없이 군중을 이루어 행진했다. 나도 무슨 힘이 남아 있어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는지 모른다. 모두들 최루탄에 견딜 수 있도록 비닐 봉지와 마스크를 쓰고 멀리 나가지도 못하는 보도 블록 조각을 팔매질 했다. 전국에서 수백만이 되는 여러 계층군중들이 온통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래, 그때에 우리는 희망에 가득차 있었다. 우리는 파쇼 독재를 몰아내고 모두가 사람다웁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새롭게 세우리라 작정했다. 군부는 친위 쿠데타 직전에 한 걸음 물러나 직선제를 공표하는 선에서 전국적인 항쟁을 잠재웠고 그때부터 우리의 실패가 시작 되었다. 항쟁이 만들어 놓았던 공간 안에서 이제 눌려만 살아왔던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시작되었지만 시민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직선제로 선거에 의하여 정권을 바꾸는 길만이 유일한 것처럼 보였다. 항쟁이 끝나고나서 곧 여름방학이 시작 되었다. 송영태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 형? 나야, 영태야.

아, 오랜만이야.

미경이가 생일 핑계를 대고 나와 그를 만나게 해주었던 것이 꼭 일 년만이었지만 내게는 한 십 년은 지난 일인 듯이 생각 되었다. 마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뒤에 생존자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그런 경우처럼.

지금두 거기 있니? 이젠 별 일 없겠지….

별 일이 있지. 나 여기 병원이야.

왜, 어디 아퍼?

응 그전 거기가…이젠 많이 좋아지구 있어. 잘 지내나 늘 궁금했다.

이젠 대명천지루 나와야지. 공부두 열심히 하구 말야. 어느 병원인지 알려 주라. 내 지금 갈게.

나는 경기도에 있는 카톨릭 재단의 무슨 요양원인가 하는데로 그를 찾아갔다. 그 무렵에 지방 강의 때문에 차를 샀는데 소질이 있었는지 고속도로에 금방 적응해 버렸다. 나는 자기 자유 의지대로 어디든 이동해 갈 수 있는 자동차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핸들을 잡고 앞이 휑하게 빈 도로를 달려 나갈 때의 고적함이 괜찮았다. 내가 얼마나 개인주의자인지 그리고 남과 섞이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물건이 아닌가. 작은 산을 등지고 있는 정갈하고 조용한 요양원에서 그를 만나는 게 어쩐지 이상했다. 간호사들 중에는 수녀 복장이 많이 보였다. 수녀가 나를 운동실로 데려갔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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