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전주성/계좌추적과 不信사회

  • 입력 1999년 11월 10일 19시 58분


옛날 어떤 공화국에서 머리는 보통이지만 매우 부지런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은 나름대로 다양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으로 민생의 질을 높여보려고 했지만 만들어내는 제도마다 흠이 많아 사회 갈등만 양산하였다. 그러자 다음에는 그 사회에서 가장 머리좋은 사람이 대통령으로 뽑혔다. 이 사람은 선진국에서 성공한 사례만 골라 보기에 매우 훌륭한 법규정과 제도를 만들었는데 결과는 과거와 별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믿고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용 붕괴땐 위기

경제발전에 관한 한 서구 자본주의가 우월한 체제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것 네것을 구별하는 사유재산권의 개념이 분명하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회제도가 충분했다는 것이다. 개인이건 기업이건 시장에서 주어지는 가격과 사회에 존재하는 법규정을 근거로 거래를 하며 모두 남들 신경쓰지 않고 각자의 선택을 하는데도 사회적으로는 효율적인 자원배분이 이루어진다는 데에 시장경제의 매력이 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변되는 시장의 힘은 곧 사회시스템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가격이나 제도를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일시적이고 인위적인 힘이 이를 바꿀 수 없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다. 독점기업들에 의해 가격조작이 쉽게 가능하고,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제도가 자주 바뀌는 불투명한 환경에서는 믿고 거래하는 ‘신용’이 창출되기 힘들고 신용에 근거한 경제행위가 확산되기 힘들 것이다.우리는 경제위기를 통해 투명하고 일관성 있는 제도의 부재로 인한 신뢰의 파괴가 어떤 파멸을 초래하는지 경험하였다. 성장의 초기단계에서는 자원을 동원하고 이를 효율적인 용도에 배분하는 수단으로서 규제의 ‘보이는 손’이 효과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충분히 커진 상태에서는 규제보다는 경제주체들이 자발적으로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제도와 유인을 제공하는 것이 정부의 바람직한 역할이다. 좋은 제도와 이것이 돌아간다는 사회인식이 함께 존재해야 시장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요즘 불법 도청 감청이나 계좌추적에 대한 논란이 사회를 흔들고 있다. 사실 합법이건 불법이건 실제 이런 추적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어차피 소수일 것이다. 그런데도 다수의 시민이 불안해하고 불쾌해하는 것은 만의 하나 나의 사생활이 탐색될 경우에 대한 상상이 불러일으키는 극도의 억압감 때문이다.

마치 암에 걸릴 확률은 적지만 걸리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계좌추적도 그 가능성만으로 끔찍할 수 있는 경우다.

◆정부홍보 안먹혀

사실 금융거래의 추적이 적법하고 신뢰성있게 행해진다고 사람들이 믿는다면 계좌추적 건수의 절대수치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관공서의 눈치보기에 이골이 난 우리의 상거래 정서에 비추어 볼 때 몇 개의 불법추적 사례만으로도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상기될 것이고 이에 따른 금융거래의 위축현상이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따라줄 문화나 관행이 수반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즉 정부의 노력은 좋은 법제도의 제정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회관행으로 국민의 의식 속에 뿌리내릴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유사한 아시아적 가치를 공유하면서도 홍콩이나 싱가포르의 경쟁력이 높은 데에는 그들의 투명한 법 제도와 이것이 지켜질 것이라는 시민들의 인식이 기여하는 바가 크다.

새 천년을 꿈꾸는 비전과 아이디어를 담은 각종 행사가 넘쳐 흐르고, 선진화된 제도를 정착시키려는 구조조정이 한창이지만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제도나 정책은 헛된 노력일 뿐이다. 엄청난 예산을 들인 정부 홍보의 효과보다 정부 신뢰도에 먹칠을 하는 한두가지 사례의 역효과가 훨씬 더 큼을 정부는 깨달아야 한다. 국민에게는 법을 잘 지키라고 서슬이 퍼러면서 정부 스스로는 법을 피해다닌다고 국민이 믿게 하면 안된다. 신뢰의 손상은 작은 데서 비롯됨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불법 계좌추적을 당하는 사람들은 가진 것이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리라. 나는 언제 한번 계좌추적을 받아보나.

전주성〈이화여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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