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60)

  • 입력 1999년 11월 1일 19시 07분


서울 지리를 잘 모르던 남수의 푸념이 생각났다. 남수가 잠수함을 탔던 초창기의 일이다. 나는 서울에서 그가 안정될 때까지 도와 주고 안내하는 역을 맡았는데 낮이건 밤이건 교대자가 있기 전에는 그를 떼어 놓고 단독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처음 며칠은 밀린 얘기도 나누고 지방에 남은 후배들 소식도 듣고 했지만 일 주일이 못가서 꺼리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은 혼자 볼 일이 생겨서 그를 데리고 우리가 잠시 머물고 있던 숙소 근처의 변두리 영화관에 데리고 갔다. 시간 가늠을 해보니까 세 시간쯤 걸릴 것 같아서 남수에게 간판을 손가락질 해주면서 말했다.

저거 봐라. 연속으로 두 편을 다 때리고나면 내가 볼 일을 다 보고 극장 앞에서 기다리구 있을 거야.

남수는 언제나처럼 씩 웃으며 매표구 옆에 붙은 스틸 사진들을 훑어 보았다.

한나는 무협 영화고 또 한나는 애정물인 모양인디, 오늘 문화행사는 겁나게 문무겸비로구만 잉.

서울살이라는 게 늘 그렇지만 돌아서고나면 십분 전의 일도 잊어버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겪고 있는 눈 앞의 현실만 남기 마련인지라 내가 볼 일을 끝낸 것은 네 시간이 넘어서였다. 버스에서 내려 약속 장소로 가는데 날은 벌써 어두워져서 퇴근하는 사람들로 길이 복잡했다. 멀리 영화관 입구가 보이는데서 나는 저절로 발길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사람이 드나드는 매표구와 출입구에서 비켜난 큰 유리문으로 오르는 계단에 남수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몰골이 답답하기도 해서 먼저 지레 화를 내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도대체 지금이 몇 신데 여태 여기 앉아 있는 거야?

화면에 나오기만 하면 치고 패는 놈은 끝까지 보고요, 얼싸안고 뽀뽀하고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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