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255)

  • 입력 1999년 10월 26일 18시 36분


그가 과장에게 서약서를 올렸다. 과장은 귀찮은 듯이 종이 위로 잠깐 시선을 깔았다.

그 동안 수형 생활도 모범적으로 해냈고…우리들로서는 천사백 사십사 번이 건전한 국가관을 갖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어요. 아마 발전하는 사회를 보면 자기가 무엇을 해야될지 깨닫는 바가 많을 것이오. 다녀오면 좋은 감상문이 나오겠지요?

글쎄요…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과장이 계장을 쳐다보고 물었다.

어떻게…이 친구 혼자 나가나?

예, 다른 사람들은 심사에 들지 못했습니다.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시간은 얼마나 되나?

명일 공 아홉 시에 출발해서 일 박 이 일입니다. 총 서른 두 시간입니다.

뭐라구, 그럼 외박까지 하는 건가?

귀휴의 경우가 삼 박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랍니다. 천사백 사십사 번이 서울 출신이라 일정이 그렇게 잡혔습니다.

야아 소장님이 특혜를 내리셨구먼. 그럼 돌아온 뒤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해 보자구.

나는 교무과를 나오면서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바로 내일, 집 근처로 가는구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사동으로 오르는 시멘트의 길목에 달려있는 표어들을 입 속으로 읽어 본다. 눈물어린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 쫓기지 말고 앞서서 행하라. 오늘 나는 가족을 위해 무슨 선행을 하였는가.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다시 태어납니다.

집에도 갈 수 있습니까?

내 옆에 계호하며 걷고 있는 계장에게 물었다.

사회참관이지 귀휴가 아니여.

하다가 그가 인심이라도 쓰듯이 말했다.

모르지 오 형 하기 나름이니까. 특별면회가 있을지….

사동으로 돌아와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웃 방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건너편과 옆의 양쪽 방에서 미취업수들이 말을 건다.

오 선생, 참관 나간다고? 축하해요.

자구 온다면서?

어디루 간답니까?

벌써 미리 알고있던 담당이 귀띔을 해주었는지 소문이 파다하게 나버린 모양이다. 나는 어쩐지 미안해서 얼버무리고 만다.

뭐 당일치기겠지요. 아마 근처에서 뱅뱅 돌다가 들어올게 뻔해요.

일정도 안가르쳐 줘?

글쎄 내일 아침에 나간답니다.

내가 시큰둥하게 나오자 남들도 김이 좀 샜는지 몇마디 더 물어보지 못하고 시찰구에서 사라진다. 나는 자리에 팔짱을 끼고 누웠다. 관광지도로 나가는 외출도 아니고 상상에 실린 넋이 과거를 향해 떠나는 그런 여행이 아니라, 내 멀쩡한 의식을 담고 있는 육신이 정말 바깥 세상으로 나간다. 하지만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애간장을 태우는 고문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징역에서는 삼 년에서 사 년 넘어가는 기간이 첫 번째 고비라고 장기수들은 말했다. 오 년을 넘기면 대충 살아지고 십 년 어름에 가서 다음번 고비가 온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간격은 점점 커지면서 감옥이 집이 되어 버린다. 복도에 붙은 표어처럼 그맘때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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