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유미리/귄희로씨와 한일관계

  • 입력 1999년 10월 7일 18시 41분


폭력단 간부 2명을 사살하고 온천여관에서 농성한 권희로(權禧老)사건이 일어난 68년에 나는 태어났다. 따라서 나와 동세대 또는 연하의 세대에게 이 사건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TV를 포함해 대대적인 보도를 리얼타임으로 보고 들었던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조차 이 사건은 이미 과거의 일이 돼있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권씨는 대학생 등 젊은이와 좌익 지식인들에게는 ‘히어로(영웅)’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68년 일본은 학생운동이 격화하고 연말에는 전후 범죄사상 ‘베스트 3’에 거론되는 ‘3억엔 강탈사건’이 일어나는 등 소란스러운 1년이었다.

나는 권씨가 의식하지는 않았다하더라도 중국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표방했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상상한다.

또 69년 도쿄대 야스다(安田)강당에서 농성하며 기동대와 격렬한 공방전을 전개했던 학생들은 권씨 사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이런 시대배경 속에서 결코 적지 않은 일본인이 권씨의 재일한국인 차별에 대한 항의, 특히 경찰력에 대한 사죄요구에 공감하면서 비록 살인을 했지만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러간 오늘 일본의 학생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체제에 대한 반항,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명하는 것 등은 생각도 할 수 없게 돼 버렸다. 학생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정치적 열정도 완전히 식어 버려 권희로사건을 검증해 보자는 움직임은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보수적인 사람들이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시각은 어떤 주간지의 “라이플 마(魔) 김희로를 ‘반일영웅화’해서는 안된다”는 제목에 집약돼 있다. 재일한국인으로 인한 가난이나 차별이 빚은 행위라 하더라도 살인자라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그런 권씨를 영웅시하는 한국민의 자세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런 일본인의 의식을 한국민이 결코 가볍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재일한국인 2세인 나도 한민족이 일본으로부터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아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과거사 청산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반일감정을 영원히 갖고 있는다고 해서 과연 한일의 미래는 열릴 것인가.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은 산처럼 크지만 일본이 확실하게 사죄를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지당한 의견이다. 나는 그 의견을 이해하면서 한민족의 긍지를 걸고 우선 용서하자, 아니 용서한다는 의식조차 버리고 한국인 스스로가 역사를 청산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권씨를 영웅으로 우대하면 한때 기분은 좋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가 일본인의 혐한(嫌韓)감정을 부채질하는 것밖에 안된다면 민족으로서 정당한 행위라고 가슴을 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내 생각이 일본에서 태평스럽게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의 덜떨어진 역사인식에 불과하다고 비판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권씨를 반일의 영웅으로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차별을 받아 굴욕을 참지 못할 때는 살인을 해도 면책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기 쉬운 것이 아닐까.

물론 충분히 죄과를 받고 형기를 마쳤기 때문에 권씨의 과거를 공격하는 것은 잘못이고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도 30년 전과 비교해 줄어든 것도 아니다. 권씨를 따뜻하게 맞아들인 한국민이 비난받아서도 안된다고 단언한다. 더욱이 한국민이 권씨를 영웅취급하고 반일감정을 부채질하기 위해 이용하고 있다고 단정하는 일본의 일부 매스컴도 과잉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권희로사건을 통해 양국민이 진심으로 의논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에 도달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한국민은 나같은 재일한국인을 마음속 어디에선가 경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느끼면서도 권희로씨를 포함한 재일한국인은 반드시 양국의 가교가 된다고 믿는다.

만약 내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하면 꼭 비판해 주길 바란다. 나는 그 비판에 대답함과 동시에 한일관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전진시키기 위해 모든 기회를 통해 미력이나마 쏟아 부을 생각이다.

유미리(작가·재일교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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