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윤승모/도청증거를 대라고?

  • 입력 1999년 9월 14일 18시 38분


“한나라당이 감청 심리전을 펼치고 있다.”

도청 및 불법 감청 논란에 대한 국민회의 이영일(李榮一)대변인의 주장이다. 도청 등의 논란은 실체없는, 야당의 정략적 선전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이대변인은 14일 “‘국민의 정부’ 이후 정부기관에 의한 도청이나 불법감청의 피해자가 있으면 대보라”고까지 했다.

이대변인의 말이 사실일 수 있다. 수많은 도청 의혹 주장이 제기됐지만 “그것은 우리가 도청한 결과”라는 정부기관의 ‘고백’이나 “내가 도청당했다”고 ‘용감하게’ 나선 사람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많은 국민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파업유도의혹사건’의 장본인인 진형구(秦炯九)전대검공안부장이 폭탄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직후 강희복(姜熙復)전조폐공사사장에게 별도의 휴대전화를 건네주고 통화한 사실에서 보듯 수사기관 관계자들까지도 도청의 위험성을 상시 체감하며 살고 있다.

심지어 여권의 핵심 관계자들도 휴대전화를 두세개씩 들고 다니며 “도청될지 몰라서”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정보통신부가 제출한 자료에서도 긴급감청에 대한 사후 영장청구가 거부된 사례가 적시돼 있는 등 적어도 감청이 남용되고 있음은 이미 드러난 사실이다.뿐만 아니다. 사설기관에 의한 도청 사례가 실제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불법감청 논란은 말하자면 그런 ‘개연성’과 ‘현실’을 근거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집권여당이 “증거가 있으면 대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오만하고 무책임한 자세다.

여권 관계자들도 인정하는 대로 다수 국민이 도청에 대해 현실적 불안감을 느끼며 산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선량한 국민의 불안감과 불만을 해소하며 사생활보호 대책을 마련하는 게 정부 여당의 할일이다.

윤승모<정치부>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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