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06)

  • 입력 1999년 8월 27일 17시 49분


두 남자가 나간 뒤에야 나는 송영태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되도록이면 화를 내지 않으려고 자제하면서.

이거 계획적이지?

뭐가….

그럼 아니냐? 어쩌면, 전기 코드 있는 자리에 놓을 자리까지 다 봐 두었잖아.

유, 윤희 사실은 말야 그게….

난 한 윤희야. 유씨가 아니라구. 나 뭐 다칠까봐 쫄아서 이러는 건 아니다. 최소한 이 공간의 임자인 나에게 미리 허락은 받았어야지.

이건 다 한 형 꺼라구. 내가 빌려 쓸 참이야.

내가 이까짓게 무슨 필요가 있어? 그림 복사할 일 있니?

요새 원서 값이 얼마나 비싸다구 그래. 좋잖아, 논문이며 리포트도 복사하고.

나는 아예 화를 내지 않기로 했다.

그래 그래 내가 졌다. 손 들었어. 느이들 불온문서 만들려구 하는 거 내가 다 알아. 어쩌겠니…. 그 대신 너 말야, 집세 반반 물기야.

좀 억울한데.

나두 보험료를 받아야지.

송영태는 끙끙대며 전동타자기의 포장을 뜯어내고 전원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테이프를 끼우고 나서 두 손을 몇번 맞부볐다.

자아 인제 시운전을 한번 해볼까.

그는 상의 안주머니에서 원고를 꺼내어 타자기 옆에 펼쳐 놓더니 두 손가락을 젓가락처럼 곤두세워 한 글자씩 찍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원고를 들여다보았다. 횃불? 촌스럽기는. 고작 생각해내는 것이 들불, 봉화, 불꽃, 이스끄라의 변형이잖아.

그래 가지구 언제 그걸 다 찍니?

나는 한 자 찍고 원고에 코를 갖다 대고 들여다 보고 또 한 자를 찍어 나가는 송영태의 꼴이 답답해서 원고를 잽싸게 집어 올렸다.

어어 왜 그래. 한걸음씩 나아가면 되지.

저리 비켜, 내가 쳐줄테니까.

그를 밀어내고 전동타자기 앞에 앉자마자 나는 요술공주처럼 좌르르 쳐 나가기 시작했다. 문장의 끝까지 도달하면 땡 차르르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롤러가 저절로 움직여서 첫줄에 가서 멈추었다. 나는 저절로 기분이 풀려서 한마디 했다.

기계 좋다!

야아 타자는 또 언제 배웠지?

나 학교 선생 한 거 모르지? 교안작성이네 교육청 보고서네 공문이네 학부모님께 공지사항, 그딴 거 내가 다 쳤다는 사실.

나는 기계를 따라가면서 문장을 더듬다가 두 손가락을 자판 위에서 멈추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일관된 투쟁 방향에서 돌발적인 제계기를 포괄 운용하는 능동적 자세 보다는 우연적 계기를 확대 과장함으로써 상황에 매몰되는 맹목성을 보였다.

말 그대로야. 소탐대실 했다는 뜻이라고.

이건 누구를 위해서 뭣 때문에 작성한 거야?

동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지.

느이들끼리?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구. 먼저 바른 노선을 세워야 흔들림없는 투쟁을 할 수 있겠지.

이거 계속해서 내보낼 작정이구나.

시사적 변화가 있는 중요한 전기마다 비판적 의견을 내려구 해.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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