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02)

  • 입력 1999년 8월 23일 18시 50분


라면을 퍼서 차례로 놓아주며 미경은 노래하듯이 말했다.

먼저 한 잔씩 비우고, 가을비를 위하여!

우리는 소줏잔을 쳐들었다가 단숨에 털어넣었다. 미경이 벌떡 일어나더니 창가로 가서 언제나 늘어져 있던 두터운 커튼을 들치고 일 년에 몇 번 열지 않는 창문을 열기 시작했다. 알루미늄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창문은 기적처럼 활짝 열렸다. 저봐, 빗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도심지의 썩은 바람이지만 신선하게 씻긴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미경은 그런 바람처럼 젊었다.

역시 발상이 좋았어!

나는 진심으로 감탄해서 말했다. 그동안 정말 스스로 창문 꼭꼭 닫고 조명 불빛에만 의지해서 이 안에 갇혀 있었다. 발상을 바꾸면 세상이 변한다더니, 홈통을 타고 끊임없이 노래하는 듯 흘러내리는 빗소리와 빌딩의 마른 콘크리트 벽을 적시고 불어오는 비의 냄새 때문에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저봐! 천장에 붙박혀 있던 형광등도 바람에 흔들리고 언제나 굳어진 채 일정한 명암만을 드러내고 몇 년씩 같은 자리에 놓여 있던 석고상에 나뭇가지의 거칠게 흔들리는 그림자가 어른거리면서 전혀 다른 형상으로 변하고 있잖아. 미경이가 라면 그릇을 치우면서 말했다.

언니 나 여기서 자고 가도 됩니꺼?

응? 뭣 땜에….

집이 없으니까.

송영태가 옆에서 거들었다.

참 그렇지. 얜 남의 문간방 얻어서 자취하는데 열두 시만 넘으면 아줌마가 칼같이 문 걸어 잠그고 잔대.

나는 하는 수 없이 넘어가 주는 척했다.

그래애? 오늘만이야. 자주 그러면 안돼.

자주 오고 싶은 예감이 드는데예.

송영태가 또 끼어들었다.

얘가 한형이 마음에 들었대.

공연히 그러지들 마라. 느이들 나 포섭하려구 그러는 거 모르는 줄 알았니?

진작에 포섭된 게 아니고예? 저두 오 선배 얘긴 많이 들었심더.

나는 갑자기 짜증이 났다.

뭐야아? 그딴 소리가 어딨어? 오니 아니 내 앞에서 허튼 소리 하지 말어. 야, 송가야 니가 입 싸게 놀렸어?

송영태나 최미경이도 내 돌변한 태도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송이 연신 손을 내저으면서 재빠르게 설명했다.

아니야, 그건 오해야 윤희씨. 유신 때부터 지금까지 변혁운동의 모델들을 검토하다 보면 오 선배 사건은 언제나 빠짐없이 거론이 되구 있어. 다만 여기서 모임을 가지게 되면서 윤희씨 얘기가 덧붙여진 거야.

제가 잘못했심더. 그렇다고 저희가 좋아하는 선배님들을 뒷전에서 비아냥거리고 할 사람들은 아니라예. 그 반댑니더. 언니 화 풀으소 고마.

나는 소주를 벌컥 들이켜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송영태가 술이 깨버렸는지 말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말을 꺼냈다.

한형 노여움을 풀어. 모두가 당하는 고통을 두고 냉소할 사람은 우리들 중에 아무도 없어. 미경이 후배가 가볍게 얘길 꺼낸 건 잘못이지만 이제 시작이라 워낙 니편 내편이 분명해서 그래. 서툴고 덜 익은 것두 이쁘잖아.

됐어… 니들이 뭘 안다구 그래.

하고 대꾸하면서 나는 풀이 죽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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