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187)

  • 입력 1999년 8월 5일 18시 23분


아무튼 그렇게 되어서 송영태는 나의 일상 가운데로 진입을 했던 셈입니다. 그는 나보다는 한 살 위였지만 학번은 나와 같았고 사실 생일로 따지자면 겨우 여섯 달 차이여서 처음부터 철부지로만 보였어요. 나는 그에게 데생을 가르쳐 보면서 입시생들처럼 무슨 줄리앙이라든가 아그리파나 비너스 등속을 그리라고 하지 않고 물건들을 그리게 하였지요. 그에게 자기 신발을 벗어서 올려놓고 그려 보라고 했는데 제법 꼼꼼히 그렸더라구요. 그는 첫 달에는 한 주일에 두 번씩 부지런히 나오더니 차츰 김이 빠졌는지 하루씩 건너 뛰는 주가 많아졌지요.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에는 수강 기간을 마치는 입시생들에게 최종 평가를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몹시 바빠서 그가 와도 인사조차 제대로 건네지 못할 정도였어요. 주말이고 일요일도 없었지요. 이 학기의 입시를 바로 앞두고는 더했지만 어쨌든 겨울이 오기까지는 학생들이 일단 썰물처럼 빠져나가니까 나로서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나도 개학이 되면 틈틈이 학교에도 나가야 할테지요.

일요일 낮이었는데 그날은 다른 때보다 더 바빴어요. 전화를 받으러 화실 밖으로 나와 보니까 그가 언제 왔는지 긴 의자를 혼자 차지하고 앉아서 그 무슨 번역 작업인가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는 두 주일 가깝게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에에 그러니까… 오랜만이오.

참 나, 에에 그러니까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도….

이건 사실 국립 학교에서 보안과장 입 버릇을 흉내내다 그렇게 된거요.

나는 전화를 받고나서 머리도 식힐 겸 결석이 잦은 그에게서 수강료 받아먹기에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잠깐 인사치레로 말동무를 해주려고 했지요. 그를 찬찬히 바라보니 얼굴이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어요. 드러난 팔뚝은 타다못해 껍질이 벗겨지고 있었구요.

어디 갔다 온 거예요?

그는 의외로 간단히 대답했어요.

뭐 우리두 피서쯤은 다닙니다.

사실 우리 또래라면 그 시절에 그와 같은 말을 간단히 대답해 버리기엔 어려웠거든요.

팔자 늘어지셨군.

나는 진심으로 냉랭하게 말하고 나서 그에게 물었어요.

도대체 그림은 뭐하러 그려보겠다는 거예요. 취미 생활이신가?

이건 어릴 적의 얘기지만 맨날 땡땡이나 치던 놈이 갑자기 열을 내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새로 오신 여선생님한테 잘 보일라구 그러는 게요.

우리 화실에서 제일 게으른 걸 보니까 시들해진 모양이군.

어 그게 아니오. 관심의 다른 표현이라구.

나는 어이없이 웃고 말았습니다. 그를 한 순간도 남자라고 여겨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아니 학교에 가서도 빤한 소리만 늘어놓는 교수들이나 같은 학급 친구들과도 단답 형식의 짧은 말만을 주고 받았고, 화실로 돌아와서는 역시 입시생들과 필요한 말만 하고, 그리곤 그들이 모두 빠져 나가고 나면 혼자 우두커니 앉아서 하얀 새 캔버스나 들여다보고 있었거든요. 생각나면 집에 전화를 걸어서 은결이의 옹알이 소리를 듣기도 하고 정희와 몇마디 요즘 엄마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죠.

헌데 남의 일터에 와서 맨날 뭘하는 거예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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