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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7월 4일 22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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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경쟁과 냉전이라는 의외의 요소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인간의 ‘달여행’은 언제 이뤄졌을 지 알 수 없다.
1957년 10월 4일 전세계 TV와 라디오에선 ‘삐’하는 이상한 전자음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방송국에 항의 전화를 하는 등 소동을 벌였으나 원인은 곧 밝혀졌다.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전후 경제부흥에 느긋했던 미국에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하늘에 뜬 ‘농구공’에 뭘 그리 놀라느냐”며 의미를 축소하려 했으나 많은 미국인들은 “소련이 우주에서 핵폭탄을 퍼부을 지 모른다”며 공포에 떨었다. 인공위성 발사 성공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기술에서 소련이 앞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1960년 대통령에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아이젠하워보다 젊고 도전적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달착륙에 관심이 없었다. 미항공우주국(NASA)으로부터 60년대 중반이면 유인 우주비행이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고 그는 만족했다. NASA는 세계 최초로 달착륙을 시도하자는 제안도 했으나 케네디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예산이 너무 엄청났기 때문이다.
만일 우연히 두 가지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지 않았다면 미국의 우주개발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첫 사건은 61년 4월 12일 일어났다.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세계 최초로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한 것이다. 다시 한번 허를 찔린 미국은 경악했다. 케네디는 회의에서 “당장 소련을 따라잡을 수 있는 방법을 내놓으라”고 호통쳤다. 두번째는 3일 뒤인 4월15∼19일 피그만사건이었다. 쿠바의 카스트로 공산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CIA의 작전이 실패한 것.
미국의 위신은 땅밑으로 추락했고 케네디는 대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했다. 케네디는 단번에 국면을 전환시킬 ‘획기적 이벤트’가 필요했다.
케네디는 부통령이자 항공우주과학회의 의장인 린든 존슨에게 대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부터 “로마가 길을 닦는 기술로, 영국이 선박 제조 기술로 세계를 지배했듯 이제부터는 우주 기술이 국력을 좌우한다”고 주장했던 존슨은 60년대말 달착륙이 가능하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고 왔다.
그리고 5월 25일 케네디는 미 의회에서 유명한 “60년대가 가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고 무사히 귀환시키겠다”는 선언을 한다. 9년간 무려 250여억 달러가 든, 세상에서 가장 비싼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 달착륙은 요원했다. 대통령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제한의 권한과 지원이 NASA에 주어졌다.
NASA에는 한때 40만명이 일했으며 빽빽한 일정으로 우주선을 쏘아올려 실험하는 일이 거듭됐다.
머큐리계획에 이어 제미니계획으로 랑데부와 도킹실험이 행해졌다.
드디어 69년 7월 16일 플로리다주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아폴로 11호가 발사됐다. 4일 뒤 닐 암스트롱과 에드윈 올드린은 월세계 ‘고요의 바다’에 성조기를 꽂았다.
미국 자본주의와 소련 사회주의의 경쟁에서 미국이 승리했음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소련은 3일 앞서 무인우주선 루나15호를 달로 보냈으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상 최초로 인간이 지구 아닌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딘 것만이 화제였다.
후일 케네디의 과학자문위원장 제롬 위즈너는 말했다. “61년 봄 미국의 힘과 위신이 소련과 비슷했다면 케네디는 달착륙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의 우주개발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케네디우주센터〓신연수기자〉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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