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20)

  • 입력 1999년 5월 19일 19시 21분


건이 만날 일이 있다. 헌데 나는 지금 밑바닥에 잠수해서 기는 가오리다 가오리.

날보러 선을 대 달라고?

빈민가에서 목회를 하다가 빵살이를 한 적이 있는 최가 얼른 눈치를 채 주었다.

사실은…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그런다. 내가 끈이 떨어진 느낌이야.

나는 지난 이 월에 서울을 떠나면서 건이에게 연결을 했었다. 건이는 혜순이를 데리고 나와서 안전을 확인한 뒤에 이 십분이나 뜸을 들였다가 나타났다. 겨울 동안 내내 통신문으로 조직 관리를 해왔다는데 어디서 샜는지 그 중 하나가 검거되었다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문건이며 유인물이 들어 있던 가방을 대학원생인 조원이 학교 앞 술집에 두고 나와 버렸던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은 몹시 긴장해 있었다. 동우도 연락을 끊고 한 달에 한 번씩 하던 안전 점검도 그만 두었다고 했다. 나는 읍내에 나갈 적마다 기회를 보아 전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불통이었다.

까짓거 그럽시다. 나야 선배 목사님 덕으루 밥 잘 먹구 지내는디.

어둑신한 저녁이 되어 우리가 길 떠날 채비를 하자 그의 아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살피다가 말을 꺼냈다.

선배들 찾는다고 당신 여러번 불려 갔었는디… 어짤라고 또 이러시오.

암 일 없을팅게 당신일랑 걱정 붙들어 매소. 핑허니 댕겨오믄 되제.

너무 염려마세요. 내일 내려올테니까.

우리는 역으로 나갔다. 그 무렵에 역에서는 가끔 수배자들을 찾는다고 합동 수사조가 입구에 서서 드나드는 젊은이들을 가려내어 불시로 주민증을 검사하는 일이 잦았다. 그와 나는 역 구내로 들어가기 전에 수사관들이 나와 서있지 않은가 살피고 나서 따로 행동하기로 하였다.

표 두장 사가지고 개찰구로 들어가거라. 나는 먼저 다른 곳으로 해서 역 홈으로 들어가 있을테니까.

시계를 보니 기차가 도착하려면 십 오분이나 남아 있었다. 그를 역 구내로 들여보낸 뒤에 나는 역사 앞을 지나 수화물이 드나드는 울타리 쪽으로 접근했다. 저녁 밥 때라 그랬는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부근에서 과일이나 라면 박스로 보이는 종이상자를 하나 주워 옆구리에 끼고 슬그머니 울타리 안으로 들어섰다. 누가 물으면 화물 부치는 데를 찾으련다고 말할 셈이었지만 다행히 철로를 몇 칸이나 건너 뛸 때까지 아무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끝쪽에서 출발 노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화물차의 뒤로 돌아가 짙은 그늘 속에 숨었다. 마침 가져온 종이함은 찌그려뜨려서 깔고 앉았다. 담배도 참고 앉았더니 곧 방송이 들리고 사람들이 승강장으로 몰려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슬슬 걸어나와 철로들을 건너 사람들 틈에 끼어 섰다. 얼른 최가 다가왔다. 기차가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싯날이라 객차에는 승객이 별반 없어서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우리는 중간 쯤에 서로를 마주보며 앉았다. 아낙네 혼자 앉았다가 우리를 흘깃 살피고는 창가 쪽으로 물러나며 자리를 내주었다.

어디까지 끊었니?

내가 묻자 최 전도사는 씩 웃으면서 표를 꺼내어 보였다.

종점은 피해야지라? 영등포까지 끊었소.

잘했어.

하고 나서 나는 그가 다리를 맞은편 빈 자리에 올려 놓고 쉴 수 있도록 창가로 옮겨 앉았다. 나는 자연스레 아낙네와 마주 앉게 되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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