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개혁정치와 言路

  • 입력 1999년 5월 8일 19시 56분


우리나라에서 언로(言路)가 국정의 중요요소라는 인식을 처음으로 뚜렷이 한 정치가는 아마도 조선시대의 조광조(趙光祖)일 것이다. 그가 중종에게 올린 상소문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말의 길이 열리느냐 막히느냐 그것이 국가에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이 열리면 편안함이 있고 막히면 망하나니…(言路之通塞 最關於國家 通則治安 塞則亂亡…).” 개혁정치의 요체로 언로를 키우려다 38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정쟁에 희생된 그는 한국적 정치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시조라 할 만하다.

▽조광조가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은 유학자들인 사림(士林)과 철인(哲人)군주에의한정치였다. 연산군 폭정을 뒤엎고 왕위에 오른 중종이 ‘지식인 정치’를 목표로 삼자 그는 중종을 철인군주로 받들었다. 그의 상소문은 바로 어진 임금의 시정방침을 이렇게 제시했다. “결정을 내릴 때는 널리 물어서 하고(博詢採納), 토의에서는 널리 의견을 들어서 수렴한다(廣聞收議).” 그의 정치노선은 한마디로 언로의 활성화였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온 기둥 중 하나는 언론자유였다. 뉴욕타임스의 발자취가 그것을 알게 해 준다. 영화팬들을 감동시킨 바 있는 타이타닉호의 실제 침몰사건 때도 온갖 위험을 무릅쓴 취재보도로 성가를 높인 것이 이 신문이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오늘이 있게 한 이정표는 1971년 미국의 베트남전 기밀을 공개한 ‘펜타곤 페이퍼’ 시리즈보도였다. 정부가 이 신문사를 상대로 제소했지만 대법원은 ‘언론자유’를 이유로 신문사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따라 그 시리즈는 15일간 연재가 중단됐을 뿐 계획한 대로 모두 게재됐다.

▽청와대가 최근 한미일의 대북정책협의와 관련한 보도로 기밀이 누설됐다며 책임자 색출에 나섰다고 한다. 미국측이 강력히 항의해왔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대북 포용정책에 반감을 가진 공무원이 혐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모양이다. 개혁을 내세운 정부가 언론자유 천국이라는 미국의 항의 때문에 언로를 옥죈다면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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