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지룡/표절과 창작 사이

  • 입력 1999년 3월 18일 19시 16분


‘일본 베끼기’가 또다시 우리 문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MBC 드라마 ‘청춘’이 일본 후지TV의 ‘러브 제너레이션’을 표절한 것이 밝혀지면서 중도하차가 결정되고 작가가 협회에서 제명되는 등 전에 없던 강한 징계를 받았다.

대중가요와 TV 프로그램 등의 일본 베끼기는 이전부터 고질적이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 일방적인 매도는 곤란

예전에는 일부 특권계층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일본 대중문화에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소비자의 비판적 관심이 높아졌다. 몰래 베끼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외국 것을 베끼기 시작하면 문화 창조력이 쇠퇴하고 문화 종속의 길로 빠져든다’는 각성과 경고의 목소리도 커진 것이 이번 중징계의 배경일 것이다.

표절은 부도덕한 창작자들에게 부당이득을 안겨주는 동시에 진정한 창작자들이 설 땅을 위협한다.

소비자들이 감시의 눈을 번쩍이는 것은 표절을 밝히는 일이 사회정의를 수호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친 과민반응은 곤란하다. 일본 것과 조금이라도 비슷하기만 하면 표절로 몰아붙이는 것은 ‘일본 콤플렉스’의 발로다. ‘S.E.S가 일본그룹 자드(ZARD)를 본떴다’거나 ‘H.O.T나 젝스키스 같은 댄스그룹들은 80년대부터 일본가요계에 유행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을 베낀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표절 시비가 PC 통신은 물론 공정성이 생명인 신문에도 등장한다.

일본그룹 ‘자드’는 TV 출연도 라이브 공연도 하지 않는 베일에 싸인 밴드다. 뮤직비디오에도 보컬인 ‘사카이 노리코’만 등장한다. 음악도 포크록에 기반을 두고 있다. 3인조 댄스그룹인 S.E.S가 도대체 무엇을 본떴다는 것일까.

댄스그룹의 등장을 ‘일본 베끼기’의 범주에 넣는 것도 무지가 낳은 불공정한 시각이다. 어느 나라건 청년문화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에서 출발한다. 어른들과 다른 새로운 모습을 ‘연대적’이고 ‘집단적’으로 표현한다. 학생운동도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 이후에 등장하는 청년문화는 공통적 감성보다는 개별적 개성을 중시한다. ‘청년들이여 단결하자’는 구호 자체가 새로운 억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에서 ‘나’로 청년들의 의식이 변하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스타도 ‘젊은이들의 우상’이 사라지고 ‘나만의 누구’로 의미가 바뀐다. 모든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슈퍼스타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의 가수보다는 각자 개성이 다른 멤버들을 모아놓은 아이돌 그룹이 인기몰이에 유리하다. 이런 시대를 일본은 80년대에, 우리는 90년대 중반 이후에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 「창조적 모방」인정을

아이돌 그룹의 탄생은 시대의 흐름이 낳은 당연한 귀결이다. 일본 사례를 참고했을 수도 있다. 80년대에 베꼈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사회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90년대에 시도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대중문화의 기획력은 참신한 아이디어 못지않게 사회변화를 읽는 능력에서 나온다. 아이돌 그룹의 등장은 사회흐름을 제대로 읽었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일이다. 조금만 비슷하면 베꼈다고 몰아붙이는 태도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다.

인류에게 TV가 보급된 지 40여년. 대중문화는 방대한 창작물을 쏟아내 왔다. 이제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라는 것은 가혹한 요구다. 과거의 문화유산을 적절히 베끼면서 자기 식으로 소화하는 기술도 창조로 인정해야 할 시대에 접어들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베끼는 데 열중하는 일본도 사실은 베끼기의 명수다. 그러나 창의성이 가미된 모방이기에 아무도 문제삼는 사람은 없다.

도작 표절 모방 모티브차용 인용 참고 짜깁기 등 베끼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창작자로서의 마지막 양심까지 저버린 도작과 표절에 대한 감시와 징계는 강화돼야 한다. 그러나 독창성이 가미된 인용과 참고 등 창작자가 자기 색깔로 소화한 모방에 대해선 조금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창조적 모방까지도 ‘베끼기’라고 매도하면 오히려 창작자를 죽이는 부작용만 생긴다.

김지룡(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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