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19)

  • 입력 1999년 1월 21일 19시 30분


그래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증상이 생긴다. 자신에게 얘기를 걸곤 했다. 이 사람아 인젠 잘 시간이 됐네, 라든가 저 담당 자식은 너무 규칙만 따져, 또는 자신이 방귀를 뀌고서도 혼잣소리로 어이 되게 구리네, 하고 중얼댄다. 수인들 중에도 장기수들은 좀처럼 웃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시청각 교육시간에 영화를 보면서는 어둠 속에서 끝없이 눈물을 흘리며 실컷 운다. 영화가 끝나고 나올 때 보면 그들은 거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오랜 독거수의 특징은 감정의 표현을 빼앗긴다는 데 있었다. 우선 타인과 감정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말을 잃고, 감정을 잊고, 추억조차도 표백되어 버린다.

나는 편지를 손에 든채 방안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소스라쳐서 편지를 챙겨 봉투에 넣고는 여행 가려고 꾸려둔 가방의 제일 안쪽 지퍼를 열고 간직해 두었다.

조카는 오늘도 늦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자형과 나는 거실에 앉아서 누님이 저녁 준비를 하는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별말도 없이 소파에 떨어져 앉아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프로그램의 자투리 시간인 막간을 이용하여 요리강습을 하고 있었다. 삼십대 쯤의 깔끔한 여자가 흰 앞치마를 입고 주방기구를 늘어놓고 요리를 시작했다.

요즈음 연말연시라고 약주 자실 일이 많으실텐데요 이 시간에는 북어국을 한번 끓여 보도록 하지요. 북어국은 전통적으로 여러 지방에서 잘 알려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해장국인데요. 만들기도 간단하고 국물 맛이 시원해서 남자분들의 속풀이로 아주 맞춤한 음식입니다.

여자는 머리를 뒤로 가지런히 묶었고 얼굴 옆으로 흘러내릴 앞머리를 나비 모양의 소박한 핀으로 고정시켰다. 목이 적당히 드러난 스웨터 위에 프릴이 달리고 푸른 줄이 쳐진 앞치마를 입고 있는 단정한 주부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세상 어느 집에나 있는 보통 아내의 모양이리라.

자아, 재료를 한번 함께 보시죠. 북어포 준비해 주시고요, 생강즙, 다진 마늘, 후추도 준비 해주세요. 양념을 해야 되니까요. 쇠고기 오십 그램 준비하시고, 고기 양념으로 간장 한 작은 술, 다진 마늘 세 큰 술, 후춧가루하고 참기름 한 작은 술씩 준비 하세요. 송송 썬 실파 한 줄기, 달걀 한 개 하구요, 소금 약간이 있으면 되겠어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고 저 따스한 집의 요리 모습을 보면서 북어국 생각을 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핑 돌더니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젠 남아있는 신경 안정제를 버려야겠다.

자형이 곁에서 보고 내게 뭐라고 말을 건네려다가 못본척 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실로 오래간만에 큰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짧게 깎은 머리인데도 반백이어서 피로해 보였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 아래 반원을 그린 주름이 짙게 그늘져 보인다. 수의를 벗으니 이제야 세속의 나이가 무표정 위로 떠오르는 게 아닌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얼굴을 닦고 코를 한번 들여마시고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누님이나 자형 두 사람 다 모른척하고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한윤희와 작별했다. 그네의 마지막 말은 이 집에서 삼년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희가 오랜 세월 동안 나를 기다려 주기를 차마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에 나와 함께 영치되었던 옛날 그네의 반명함판 사진을 보면서는 옆에 가서 조용히 쉬고 싶었다.

<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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