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나미/부도덕한 사회를 고치려면

  • 입력 1998년 10월 20일 19시 19분


정말 세상이 어지럽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부모가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지 않나 여고생들이 용돈을 벌기 위해 중년남자와 관계를 맺는 ‘원조교제’가 수입됐는가 했더니 최근엔 애인과 부부를 서로 바꿔 성행위를 하는 ‘부부교환’이란 해괴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세월이 수상한 탓일까. 요즘 상담을 하다 보면 “이 세상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란 말을 부쩍 자주 듣는다.

형제에게 보증을 선 후 하루아침에 재산을 날리는 이들,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 당하고 넋을 잃은 채 병원을 찾는 이들은 “돈은 잃어도 사람에 대한 믿음은 잃지 않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

▼ 인간없는 물질의 의미 ▼

나이 드신 분들의 ‘말세’란 탄식이야 새삼스럽지 않지만 요즘 같은 총체적 가치관의 혼돈은 일찍이 없었지 않나 싶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양심마저 버리고 모두가 서로에게 적이 된다면 금수강산도 지옥에 다름아니다.

유교라는 사회규범이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철저히 통제했던 옛날에 비해 서양 기독교 윤리와 산업자본주의적 사고, 동양의 전통적인 도덕관념, 어느 하나도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어지럽게 혼재되어 있는 지금은 일종의 정신적 아노미상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너나없이 흥청망청했던 거품시대가 끝난 뒤 찾아온 극심한 경제위기에 자본주의의 물신숭배사상이 맞물려 윤리적 파탄을 초래한 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총체적 사회기강의 해이는 경제가 어려워지기 몇 년 전부터 그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실공사로 대형사고가 빈발할 때, 지도층의 부정부패 규모가 천문학적으로 커져 있을 때, 가장 순수해야 할 어린 학생들의 폭력이 갈수록 흉포해질 때 우리는 사회의 도덕관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빨리 세웠어야 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시대와 6.25전쟁, 그후의 군사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주로 강압에 의한 타율적 통제에만 익숙했었다.

자율적 양심에 따르기보다는 눈치와 법망피하기의 노하우만 집적해 왔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시민정신은커녕 경쟁만 강조하는 학교에서 자발적 도덕률을 배울 수도 없었다. 사회에서도 스승이 될 만한 지도적 인사를 우리는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을 키워 주어야 하는 가정에서는 어떠했는가. 가정 역시 물질지향적 가족이기주의에 빠져 자녀들에게 평화와 협동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못했다.

종교계도 돈 잘 벌고 출세하게 해달라는 기복신앙에 빠져 고통을 나눌 인간적인 공감능력을 키워 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같은 상황에서 사회기강이 정상적이라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도덕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배우지도 않아 존재하지도 않은 도덕이 실종되었다고 외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이런 도덕부재의 사회를 치유할 수 있을까. 물론 급한 대로 엄정한 법 집행을 통해 투명한 사회경제적 틀을 하나씩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 각자가 감시의 눈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잘못을 남에게만 떠넘기는 편리한 자기합리화는 그만두고 자신안에 부도덕과 부패의 싹이 없는지부터 점검해 보자.

장기적으로는 성취와 지식습득을 위주로 하는 이 땅의 교육제도와 커리큘럼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학생들이 갈등이나 좌절을 폭력과 범죄를 통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직장에서도 물질적 시스템만 개선할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일에 대해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정신적 구조조정작업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도 큰소리 치면서 권력과 돈만 쫓아다닐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차분하게 직시해야 한다.

▼ 큰 화를 잠시 피할텐가 ▼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겸허히 되돌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원래 곧고 바르게 살도록 만들어졌다. 만약 그렇지 않고도 요행히 살아간다면 이는 다가올 큰 화를 잠시 면하고 있는 것뿐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공자님이 살아계시다면 모든 가치관이 파괴된 지금이 오히려 새로운 예의와 도덕을 만들어 나가기 좋은 시절이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할까.

이나미<신경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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