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오정희/고향서 얻은 용기로 새출발을

  • 입력 1998년 10월 6일 19시 27분


나흘간의 추석연휴가 끝났다. 남을 사람은 남고 돌아갈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가 각자의 생활을 영위하는 일상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늙은 부모는 모처럼 자손들로 시끌벅적하게 꽉 채워졌던 집안의 빈 자리를 하릴없이 허전한 눈길로 보듬으며 간혹 손자들이 잊고 간 양말짝이나 작은 장난감 따위에 가슴을 에고 자식들은 그들대로 고향집에서 가지가지 챙겨주신 올망졸망한 보따리를 풀면서 부쩍 늙고 쇠잔해진 부모의 모습과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던, 나이들수록 닮아가는 형제들의 얼굴과 음성을 떠올리며, 가족이란 애증을 분별할 수 없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의 원류이고 또한 가장 아프고 민감한 속살일 수밖에 없다는 연민과, 정다움과, 그리움의 느낌에 젖을 것이다.

▼상처받고 달려갔던 곳▼

아이들에게는 맑고 아름다운 가을날, 부모의 고향으로 가는 길의 정경과 조부모, 일가친척과 함께 한 날들의 인상과 정경들이 유년의 무늬로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고향이란 반드시 태어나 태를 묻은 곳을 이르는 것만이 아닌, 마음 깊숙한 곳에 따뜻하고 은은한 밑불처럼 묻어두고 있는 어떤 장소, 어떤 공간, 어떤 시간, 어떤 마음들, 그래서 언제나 그리운 것들을 이르는 호칭이기도 하리라.

한 나무의 뿌리와 가지와 열매처럼, 한둥지 속의 알들처럼 부모와 형제가 모든 것을 함께 누리고 나누며 살았던 터전이 바로 고향이고 그래서 그곳은 특정지명의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 마음의 공간에 더 가깝다. 때문에 실제의 고향이 피폐하고 황폐하여 옛모습을 찾을 수 없다 해도 고향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나 정서는 피폐해지지 않는다.

외양과 풍속과 인심이 어떻게 달라졌든 고향이란 상처와 위안과 치유가 함께 있는 곳이고 원점이기도 하여 고달프고 어려울 때 막다른 길에서 되돌아가 다시금 새출발할 힘과 용기를 얻는 곳이다.

객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에게 귀향은 단지 전통과 풍속이라기보다 ‘잃어버린 시간 찾기’이고 그 시간의 재현이며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기에 긴 여행의 고달픔과, 불편함과 짜증을 감수하며 먼 고향집을 찾고 아이들은 밤늦도록 차례상의 음식을 만들거나 밤을 치고 향을 깎는 어른들의 곁에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가족사와 조상들의 얘기를 전설처럼, 옛날이야기처럼 들으며 상상력의 불을 지핀다.

추석차례를 지내기 위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는 해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행사이고 의례지만 그동안 새 식구가 들어와 가족이 되고 아기가 태어나고 어린아이들이 소년으로 청년으로 자라는가 하면 늙은 사람은 세상을 떠나는 등 조금씩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그 느리고 사소하고 당연한 가족사의 흐름이 바로 자신이 주체로서 동참하는 역사임을 깨닫게 된다.

조상의 묘소를 찾아 차례를 올릴 때면 나란히 엎드린 형제들이 정이 깊으면 깊은대로, 소원하면 소원한대로 한가지로 따뜻하고 오롯이 마음이 모이고 그들 모두 한뿌리 한핏줄의 자손이라는 것을, 네가 바로 나임을, 서로가 충실히 살고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신산한 세월을 많이 겪은 어른들은 좋을 때는 흩어지고 궂은 일에는 모이는 법이라고, 몹시 외롭고 고달플 때면 집생각이 나는 법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가족이 안식처이고 최후의 보루라는 의미일 것이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부터 주요도로를 메운, 필사적으로 고향을 향하는 차량들을 보며 애틋하고 안쓰러운 감상을 일으키게 되던 일이나, 한가위의 무심하게 크고 밝은 달이 야속하게 보이거나, 가을들녘과 들꽃세상이 어찌 이리 아름다운가, 처연한 심사가 느껴지는 것은 불안한 세월, 스산한 마음 탓일 게다.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IMF를 들먹이기도 싫지만 정말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이다.

실직과 앞날에 대한 불안과 가족의 이산이 도무지 해법을 찾을 수 없는 문제로 만연해 있다.

돌아갈 고향과 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은 경제난이라는 무섭고 두려운 불청객 앞에서 가난하고 겸손해진 마음의 덕일 것이다.

어느 작가는 가족을 ‘모여있는 불빛’이라고 표현했지만 정말 춥고 어두운 밤 가족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는 가난한 집의 불빛은 얼마나 따뜻하고 정다운가. 멀리까지 비추이는가.

오정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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