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오명철/26년전 물난리땐…

  • 입력 1998년 8월 9일 20시 27분


수해소식을 접할 때마다 26년전 직접 겪은 ‘물난리’가 떠오른다.

한강 홍수피해가 컸던 72년 우리집 식구 네사람은 서울 영등포 도림천변에 살고 있었다. 8월 어느날 새벽 “빨리 일어나라”는 아버지의 다급한 외침에 눈을 떴다. 도림천이 넘치면서 물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겁에 질린 내게 아버지는 단호하게 “책과 가방부터 챙기라”고 말씀하셨다. 없는 살림이지만 그나마 값나가는 물건을 하나라도 더 챙기려 허둥대던 가족들은 머쓱해졌다. 고1과 중1 두 아들이 교과서와 공책을 그럭저럭 수습해 다락에 넣은 뒤 아버지는 비로소 이부자리와 사진첩 같은 것을 챙겼다.

물이 밀려오자 아버지는 우선 집안의 전기를 끊었다. 폭우 속에서 펜치를 들고 전선을 끊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30여분만에 물이 방안까지 찼다. 라디오를 통해 비소식을 듣고 있던 아버지는 두 아들을 불러 “어머니를 모시고 침수지역 밖으로 헤엄쳐 나가라”고 ‘명령’했다. 아버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큰아들이 “함께 있겠다”고 버텼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제때 고향인 평양에서 대홍수를 체험하기도 했던 아버지. 그는 집이 완전히 물에 잠기기 전에는 결코 집을 떠나지 않을 작정이었고 물난리속 ‘좀도둑’들로부터 ‘가재도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락과 지붕에서 발끝까지 차오르는 물을 보며 사흘밤낮을 지냈다.

물이 빠진 뒤 아버지는 심한 치통을 앓았다. 심신의 피로가 누적됐던 것이다. 두 아들의 교과서와 공책은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고 방학숙제도 아무 탈 없이 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3년후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다시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아버지들이 가족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을까….

오명철<사회부>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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