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정옥/문화의식 결핍이 부른 위기

  • 입력 1998년 6월 7일 20시 14분


20세기가 저물어 가고 있다. 세기말과 위기는 무관하지 않다고 할까. 19세기 말에도 우리는 엄청난 민족과 나라의 위기를 맞았는데 20세기 말에도 또다시 우리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19세기 말 우리가 위기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해 반세기에 걸친 치욕의 역사를 견뎌야 했고 한국전쟁에 이르는 허구한 비극을 겪어야 했던 사실을 상기할 때, 20세기 말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낯선 이름의 괴물이 몰고 온 엄청난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21세기 우리의 운명은 결정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상반기에 겪었던 비극이 21세기에 되풀이될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이 하나가 되어 슬기롭게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극히 피상적으로 위기에 대처하는 감이 없지 않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가 한보와 기아사태로 비롯됐고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관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 상식론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식적 논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근본적 문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는 이미 5년전 싹트기 시작했고 그 예비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삼풍백화점이 붕괴됐을 때 이미 97년 말의 경제적 붕괴와 IMF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왜 일어났는가. 경제가 허약해서, 기술이 부족해서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됐는가. 아니다. 우리는 충분한 경제력이 있었고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충분한 기술력이 있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도덕성의 상실, 문화의식의 결핍에서 유래되는 인간성 상실 때문인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보사태, 기아사태,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무책임한 대응이나 책임전가, 경제인들의 방만한 경영 등도 경제적 측면보다도 인간성의 상실과 문화적 추락에 기인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고 있는 위기는 단순한 경제적 위기가 아닌 총체적 문화의 위기다.

위기를 극복하는 대응책이나 처방도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위기를 말하고 경제적 처방만을 제시한다. 경제가 급한데 한가롭게 문화를 생각하고 논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처방은 일시적으로 위기를 봉합할지는 모르지만 더욱 깊은 위기의 수렁으로 몰고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우리의 오늘날 위기는 외상(外傷)을 좀 치료하고 환부를 도려내는 단순한 외과수술로는 그 치유가 불가능한 것이다.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주고 구조조정을 한다고 해도 분수에 맞지 않게 돈을 빌리고 남의 돈으로 벼락부자가 되겠다는 정신상태를 고치지 않는 이상 경영파탄의 악순환은 되풀이될 것이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오직 끼리끼리만 잘 살면 된다거나 너죽고 나죽자는 식의 자포자기는 우리사회를 구원될 수 없는 수렁으로 끌고갈지 모른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경제적 처방이 아닌 문화적 처방에서 나와야 한다. 다만 문화적 처방은 단기적 치료가 아니라 긴 인내를 전제로 한 오랜 치료가 될 것이다. 게다가 그 치료방법이나 처방은 경제적 처방이나 어떤 조치처럼 구체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고통과 인내를 통해서 스스로 깨달을 때를 기다려야 할는지 모른다.

다만 이 시간에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경제적 위기가 위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위기의 본질을 직시하여야 한다.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는 출발점은 우리의 위기가 총체적 문화적 위기이며 문화의식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문화를 생각하고 21세기를 향해서 새로운 정신혁명을 준비해야 할 시점에 와있는 것이다.

김정옥<연극연출가·예술원회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