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 칼럼]聖雄이 지킨 나라

입력 1998-05-01 21:00수정 2009-09-2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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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은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의 453회 탄신일이었다. 올 12월16일은 공(公)의 순국 4백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찍이 천관우(千寬宇)는 말했다. ‘충무공이라면 삼척동자라도 이름을 안다. 그러나 충무공을 우리가 안다면 얼마나 아는가. 거종(巨鐘)은 크게 울리면 크게 울고 작게 울리면 작게 운다. 충무공이라는 거종을 몸째로 부딪쳐본다 해도 얼마만한 소리로 울어줄는지.’

▼ 국난때 떠올리는 충무공 ▼

정인보(鄭寅普)는 충무공을 명장이라기보다는 성자(聖者)라고 해야 옳다고 했다. 충무공의 평생 지기(知己)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은 충무공이 재능은 지녔으나 운명을 타고 나지 못해서 백가지 재능 가운데 한가지도 제대로 펴보지 못했다고 애석해 했다. 아산 현충사(顯忠祠)에 사액(賜額)을 내린 숙종(肅宗)임금은 ‘몸을 죽여 나라를 살린(身亡國活) 일’은 고금 역사상 충무공이 처음이라고 기렸다.

동아일보는 일제하 1931년5월 충무공 유적보존운동을 선창하면서 민족이 충무공을 잊은 것이야말로 ‘민족적 이상이 결여되고 민족적 정열이 냉각되고 민족적 자부심이 마비된 민족적 수치이자 범죄’라고 개탄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순국 4백주년의 충무공을 추모하는 것은 무슨 뜻이겠는가.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는 한말 국망(國亡)의 문턱에서 구국의 영웅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순신전(李舜臣傳)’을 썼다. 산운 장도빈(汕耘 張道斌)이 일제 하에서 ‘이순신장군전’을 펴낸 것도 사라져가는 민족혼을 붙잡아 세우려는 충정이었다.

충무공은 민족의 고난 속에서 더욱 빛나는 위인이었다. 그의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우국충정으로 가득 차 있다. ‘혼자 다락에 의지했다. 나라 정세가 위태로운데 안으로는 방책을 세울 기둥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만한 주춧돌같은 인물이 없음을 생각하니 사직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몰라 마음이 산란했다. 하루 종일 앉았다 누웠다 했다.’ ‘초저녁에 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국사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 할꼬’.

충무공은 과연 나라와 백성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해낸 민족적 은인이요,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오직 대의(大義)를 따른 민족의 의범(儀範)이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발명한 민족문화의 선구였다(동아일보 1931년 5월 14일자 사설). 그러나 충무공의 진면목은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47세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될 때까지 길고 긴 15년동안 미관말직으로 변경을 전전하던 그 불우했던 시절의 몇가지 일화들에서 두드러진다.

충무공이 무과에 급제하자 당시 병조(兵曹)의 고위직에 있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그의 인재(人材)됨을 전해 듣고 유성룡에게 부탁하여 한번 만나보기를 청했다. 충무공은 “율곡은 나와 동성동본이니 뵈어도 좋겠지만 그가 병권을 맡고 있는 동안은 찾아가지 않겠다”며 만나지 않았다. 변방 하급장교로 근무할 때는 직속 상관의 인사청탁을 단호하게 거절한 적도 있고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자기 서녀(庶女)를 측실로 권하자 “내 어찌 권문세가를 등에 업고 부귀를 도모하겠느냐”며 내치기도 했다.

▼「필사즉생」의 신념 그리워 ▼

충무공은 부패한 시대에 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한번도 고고한 뜻을 굽히지 않은 강직한 기개 때문에 생애에 두번씩이나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수모를 겪었다. 감옥에 갇혀 심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세에 아부하거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12척의 배로 1백33척의 왜적과 맞선 명량(鳴梁)해전에서도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신념으로 죽도록 싸워 이겼다. 그가 그렇게 지켜서 물려준 나라다. 국난의 시대, 그 성웅(聖雄) 이순신이 그립다. 그를 안다면 진실로 얼마나 알까마는.

김종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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